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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니아 길가메쉬X니아2p

* 영령이 되기 이전, 생전의 길가메쉬와 저주를 받아 영생을 사는 여자가 나옵니다. 또한 실제 길가메쉬 서사시와 Fate/Extra CCC에서 밝혀진 길가메쉬 전승에 대한 날조가 가득합니다. 부디 주의해주세요!

 

 

 

 

 

 

 

  0.

 

 

 

 

 

 

 

  또 만나네요, 왕님.

 

  언제인가의 여자가 웃는다.

 

 

 

 

 

 

 

  1.

 

 

 

 

 

 

 

 왕이시여. 저 멀리 동쪽 황야 너머 어딘가에, 영생을 사는 계집이 있다고 하옵니다.

 

 

 

 

 

 

 

  2.

 

 

 

 

 

 

 

  사내는 유일한 벗의 죽음을 보았다. 아마 그 순간 처음으로, 영생에의 집착이 생겨나 마음 한 켠 또아리를 틀었다. 진흙으로 된 몸이 대지로 돌아가면 자랑스레 이야기하곤 하던 기억도 추억으로 바래지고 말았기에. 손에 가지지 못한 것도 없고 그 힘으로 무너뜨리지 못한 것도 없다. 그런 사내였다. 그랬기에 단 한 번의 소실이 그토록 절망스러운 것이다.

 

 그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독과 고요 속에서 침잠했다. 그리고 단서라고는 가야하는 방향 이외엔 없는 길고 긴 여행을 시작했다.

 

  

 

 

 

 

  3.

 

 

 

 

 

 

 

  몇 날, 며칠이고 이어진 강행군이었다. 영생도 모자라 지치지 않는 몸까지 절실해지는 나날 속에서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올리면 그는 어느덧 황야의 초입에 도달해 있었다. 아무것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리란 가늠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 메마른 곳. 볼모지. 드디어 찾아내었다는 만족감보다는 무엇도 피어나지 못할 땅에 대한 불쾌함을 느끼며 사내는 졸도했다.

 

 

 

 

 

 

 

*     *     *     *     *

 

 

 

 

 

 

 

  “정신이 드세요?”

 

  저를 내려다보는 소녀에게선 얕은 눈동자, 갈색으로 빛나 더욱 어스름한 그 한쌍의 눈동자와 아무렇게나 기른 검은 머리칼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정신은 차렸지만 대답없는 사내의 어딘가가 혹 불편한 게 아닌지 걱정하는 얼굴로 얕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저어, 이거 보이세요? 사내는 목소리를 내는 대신 그 손을 잡아채었다. 놀란 눈동자가 그곳에 있다. 그리고 불모지. 황무지. 버려진 땅. 그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 피폐한 대지에서, 그것만이 유일하게 생기를 지니고 있었다.

 

  사내는 직감했다. 이 계집은 저를 명계로 이끌 죽음의 화신, 그것이 아니라면 제게 영생을 부여할 유일한 실마리일 것이라고.

 

 

 

 

 

 

 

  4.

 

 

 

 

 

 

 

  처음엔 이름을 물었다. 마지막으로 불린 것이 너무 오래되어 잊었다고 소녀는 말했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아마 이런 이름이었을 거라 그녀가 중얼거린 짧은 단어는 사내에게 있어 생소함이었다. 몇 번이고 따라불렀지만 제가 뱉어낸 이름은 스스로가 듣기에도 어설프기 짝이 없어서, 그는 비슷하게 따라할 수 있었던 부분만을 가져와 그것을 그녀의 이름으로 삼았다. 독선가의 행동이었으나 여자는 그냥 웃고 말 뿐이었다. 그렇게 불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요.

 

  그 다음엔 나이를 물었다. 제가 몇 살처럼 보이세요, 장난스럽게 묻는 얼굴은 스무 해를 넘었다한들 얼마 되지 않았을 새파란 뺨이다. ……. 침묵하는 사내를 보며 더욱 환히 웃고 그녀는 대답했다. 굳이 어림하자면 제 앞에 계신 분의 곱절의 곱절 정도겠네요. 하지만 그 입술로 금방이라도 청명한 웃음 소리를 퍼뜨릴 것만 같아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저런 모습으로 제 곱절을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 사내는 아찔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금방 스스로를 추스르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사실 소개라고 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왕좌에 오르지 않았던 날이 올랐던 날보다 손꼽힐 만큼 적었던 우르크의 재정자였으므로 다른 이에게 직접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서툴렀다. 그를 둘러싼 세상은 그를 모른다는 것이 어불성설인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제 이름을 말하는 순간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왕님이세요, 하고 되물어왔기에 제 염려는 불씨조차 남지 않고 사그라들었다.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면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아마 영생을 찾기 위해 오신 거겠죠. 힘 내세요!’ 그렇게 제멋대로 말을 끝맺고는 다시 제 할 일을 시작했다.

 

  “…….”

 

  그러니까,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사내는 눈만 꿈벅이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단서가 제게 격려의 말을 건넨 것이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5.

 

 

 

 

 

 

 

  그리고 첫만남에서 이미 시사했듯, 여자는 도통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물론 사소한 농담이나 그녀가 이제껏 살아오며 사내에 대해 들었던 많은 것을 주워섬기는 일은 비일비재했지만 그가 영생에의 호기심을 비추는 순간 조개처럼 입술을 꾹 다물어 목소리를 가뒀다. 고집불통. 그럴 땐 그런 표현이 딱 걸맞는 얼굴이었다. 

 

  제 수고를 무용으로 만들 셈이냐 역정을 내며 사내가 언제인가 재보를 꺼내들어 겨누었던 일도 있었다. 그녀는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았지만 이내 머쓱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프기야 하겠지만 저는 그런 걸로 죽지 않아요. 그런 한마디와 함께였다. 호기를 거꾸러뜨리는 미소에 희미해지는 의욕을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사내는 탈력감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6.

 

 

 

 

 

 

 

  “저주예요.”

 

  사내는 제 기대가 모조리 박살나는 소리를 들었다. 성의없는 문장이었으나 그녀가 뜻하는 바를 모를 리 없다. 끈질기다면 끈질겼다고 말할 수 있는 채근과 독촉 속에서 결국 백기를 들어올린 것은 여자 쪽이었지만 보다 깊이 쏟아져내리는 패배감에 얼굴을 물들인 것은 사내였다.

 

  저주라고 했느냐, 그렇게 물으면 그녀는 얕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왕님께선 모를, 까마득한 곳에 자리한 작은 나라가 제 고향이에요. 그렇지만 그 땅에도 제 권능을 위시하는 신의 무리가 있죠. 저는 그 분들 중 한 여신의 미움을 샀어요.”

 

  이유는 말씀드리지 않을래요. 이야기하자면 길어지니까. 여자는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터무니없었던 일을 간략히 줄여버리곤 계속 말했다.

 

  “생의 의미도 찾지 못한 계집 아이야, 그 아둔함으로는 무쓸모한 황초조차 키워내지 못하겠지. 그러니 네 주변의 모든 것이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가 되고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바스러질 때까지도 살아남아 네 무지함을 원망하거라.”

 

  “…….”

 

  “그런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해요.”

 

  여자는 잠깐 한숨을 쉬었다.

 

  “물론 처음엔 울며 불며 여신께도 빌어보았답니다. 제 무지와 불충을 부디 어여삐 여겨, 이 저주를 끊어주시옵소서…, 하고요. 그렇지만 제 기도엔 코웃음도 치지 않으셨어요. 부정의 답이라도 돌아왔다면 계속 이어나갔을 테지만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정말,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때 저는 죽는 걸 포기해버린 거예요. 아,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살아야겠구나.”

 

  말을 끝맺은 여자는 피식 웃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게 아니냔 얼굴을 하고 계시네요. 사내는 이미 보여진 속내를 감추기보단 눈썹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녀는 짧게 부언했다.

 

  “저는 체념이 빠르거든요.”

 

  무엇을 체념했는지. 얼마만큼을 체념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내는 이제는 익숙해진, 작게 미소짓는 얼굴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한숨 같은 얕은 숨결에 깨어질 아스라함이라고 해도.

 

 

 

 

 

 

 

  7.

 

 

 

 

 

 

 

  수많은 날이 저물고 다시 시작되었다. 여자가 매일 아침마다 곁에 누운 사내를 보며 질겁했던 것도 이제는 더이상 반복되지 않을 무렵, 그녀는 작은 오두막 아래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이 땅에선 드문 일이었다.

 

  “저는 아주 먼 땅에서 왔어요. 몇 번이고 강과 바다를 건넜고 독사가 우글대는 숲을 갈랐고, 목마름에 버둥거리는 사막도 건너면서요.”

 

  빗소리에 묻혀버릴 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돌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제 삶을 두 번째로 내어놓고 있었다. 어떤 심경의 변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귀 기울이지 않으면 놓칠 것이다. 사내는 벽 한 켠에 난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야트막한 빛줄기만이 비추는 옆얼굴이 창백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 죽었겠죠. 그치만 저는 죽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분명 편리한 몸이에요. 공포만 조금 극복한다면.”

 

  “공포라고?”

 

  “네.”

 

  공포. 제 말을 다시 한 번 곱씹는 목소리는 보다 낮았고, 그를 보지 않는 시선은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투두둑 하는 빗소리. 빗소리. 그리고 또 빗소리. 빗소리가 모든 공백을 모조리 메우고 나서야 소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죽지 않는 몸이 되었다고 공포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왕님. 저는 아직도 발이 닫지 않는 깊은 물은 무섭답니다. 제대로 헤엄치질 못해 가라앉고 있으면 목을 타고, 코를 타고 넘실대는 물결이 곧이 곧대로 느껴지거든요. 쓰라린 고통도 그대로예요. 그래서 웃긴 표현이지만……, 그런 순간이 닥치면 죽을 힘을 다해서 늘 뭍으로 빠져나와요.”

 

  “…….”

 

  “이제까지 본 빗방울의 수보다 많은 해를 살아왔지만 여전히 낯선 것들 가득한 밀림이나 숲도 끔찍해요. 이미 말했듯이, 고통스러우니까. 물론 때가 되면 사라지는 고통이에요. 독사의 맹독에 끙끙 앓다가도 억지로 걷다 보면 어느샌가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게 걷는 제가 있고……,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을 수 백 밤이 지나도록 이고 진 채 살아가다가도 물 한 모금에 다시 되돌아오는 몸이 있어요.”

 

  한숨 같은 마디 마디였다. 창백한 얼굴로 수면 아래에서 버둥대고 낯선 숲에서 상처입고 사막 한복판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사내는 상상해보았다. 수 초도 되지 않았건만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죽지 않는 몸. 다만 죽지 않는다는 것만이 유일한 자랑거리인 삶. 시간의 반역물.

 

  “다음엔 조금 덜 무섭겠지, 노련하게 대응할 수 있겠지 생각한 것도 벌써 몇 년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멍청해서 그런 걸까요?”

 

  “…….”

 

  “아니면 이런 건, 삶이라고 할 수 없기에 그런 걸까요.”

 

  “…….”

 

  “그래도 여전히 썩 나쁘지 않은 인생이라고 왕님은 생각하시나요?”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공허가 넘실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지만, 영원히 지켜봐야만 하는 형벌에 사로잡힌 소녀에게서는.

 

 

 

 

 

 

 

  8.

 

 

 

 

 

 

 

  “구차한 꼴이구나.”

 

  손가락으로는 셀 수 없는 일몰을 지나보내고서야 사내는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여자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더께로 웃었다. 명랑한 듯 보였던 얼굴 한 켠에 스치는 자조와 무기력함에 사내는 그러나 다시 입을 다물 뿐이었다. 이번엔 몇 번의 일출 후에야 그녀에게 건넬 말을 꺼내올릴 수 있을까.

 

 

 

 

 

 

 

  9.

 

 

 

 

 

 

 

  “산책이라고?”

 

  “네. 따라오시겠어요?”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저문 밤이었다. 뜨겁게 타오르던 모래가 이미 차갑게 식어내린 땅을 밟으며 여자가 돌아보았다. 사내는 그 얼굴 면면을 깊이 살펴보았지만 원치 않게 생겨버린 군식구에게 어쩔 수 없이 의례적인 청유를 건네는 표정은 아니었다. 정말로 아무 것에도 개의치 않는 얼굴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 걸어나왔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것도 마땅치 않은 곳에서 괜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몇 걸음 뒤쳐진 곳에서 여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망설임이라고는 없이 걷는 모습은 어느 날엔가 밤눈이 어둡다고 말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아무 것도 없는, 그저 메마른 황야였기에 거침없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단 한 번도 멈추는 일 없이 나아가는 다리를 따라가면 어느샌가 달빛이 두 사람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그 흔적을 따라 올려다 본 하늘에선 보름달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사내는 그녀를 만난 이후 단 한 번도 신경이 머물지 못했던 시간의 흐름을 문득 깨닫는다.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나온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보름달은 속을 파먹히고, 또 다시 피어났을까. 

 

  그리고 그녀는 그 흔적을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지금, 밤바람에 이리저리 너풀대는 옷자락을 제자리로 부여잡으려 애쓰는 손길은 영락없이 이 세상의 것이었지만 그 목숨만큼은 궤도에서 벗어나 있다. 함께 하는 순간에도 자주 잊곤 하는 그 영생이라는 이름. 이제는, 어째서인지 부질없어진.

 

  “왕님은 왜 영생을 살고 싶어하시나요?”

 

  돌연 날아온 질문에 사내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를 부른 얼굴을 바라보지만 그녀는 아직도 흩날리는 옷자락을 꾹 잡아내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제가 들은 목소리가 혹 다른 이의 것인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곳에는 오로지 두 사람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사내는 멀지 않은 과거를 추억 속에서 꺼내올렸다.

 

  수많은 것을 쥔 삶이었다.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취했고 으스댈 수 있는 모든 것은 긍대했다. 사내가 쥐지 못한 단 하나를 깨닫기 전까지는. 삽시간에 검게 물드는 눈가가 쓰라렸다. 그리고 여자는 그 얼굴을 흘금 바라본 것만으로도 정답을 알게 되었다. 물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지만.

 

  “필멸이 두려우셨던 거겠죠.”

 

  사내는 침묵으로써 그 질문을 긍정했다. 그리고 사내가 무언을 고집해 바람조차 멎은 고요한 황야에선 이제 더 이상 나풀대는 옷자락을 붙잡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여자는 긴 치마자락을 놓으며 돌아섰다.

 

  마주한 사내의 얼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회한이 가득했다. 찾아 들었던 이야기만으로도 그가 얼마만큼 고통스러웠고, 번뇌하였는지 어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마 태초부터 지녀왔던 의무조차 희미하게 만들어버릴 정도였겠지. 그녀는 한숨을 쉬듯 웃는다.

 

  “영생이란 건 드문 것이니 만큼, 이건 다만 제 편협한 감상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영생은 일말의 유열도 찾을 수 없는 지리멸렬한 영위일 뿐이랍니다. 감히 확신할 수 있어요.”

 

 

 

 

 

 

 

  10.

 

 

 

 

 

 

 

  “그리고 왕님께선,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영생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신의 힘이죠. 지금의 왕님은 신을 구폐하고 인간에게 부는 삭풍이 되겠다고 하셨던 것과 점점 어긋나고 있네요.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구가하기에, 저처럼 구차한 영생을 살지 않으셔도 되는 분이시면서. ”

 

  책망하고 있지 않지만 책망하는 듯한 어조였다. 눈을 깜박이면 어스름한 밤빛 아래에서 그녀의 손 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광막한 황야의 끄트머리에 걸린 지평선이었다. 암흑 속에서 비추어오는 월광이 유일하게 보여주는 것. 그 가는 선은 시야의 끝과 끝을 잇고 있었다.

 

  “이 땅에서, 무언가 보이시나요?”

 

  지평선이 선명하리만큼 보이는 이유는 다른 무엇도 그것을 방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텅 비어 있을 뿐인 땅. 여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대신 자문자답했다. 고개를 젓는 모습은 이제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시겠죠. 여기엔 정말로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긴 삶에 물려 제 고향도 버리고 도망쳐 온 계집 하나를 뺀다면. 그런데 그 계집은 어떻게 당신을 알고 있었을까요?”

 

  사내는 모를, 까마득한 곳에 자리한 작은 나라가 소녀의 고향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빠져나와 방랑한 것이 그 긴 삶의 전부라고도 했다.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삶 속에서 이을 수 있는 관계 같은 것도 없었을 것이다. 스쳐지나가고 날려 보냈을 모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사내를 알고 있었다. 사내를 놀라게 할 만큼. 

 

  “사막을 노니는 바람이 전해주었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것처럼 그저, 왕님의 이야기는 제가 지나쳐온 모든 곳에서 구전되고 있었어요. 저는 지금껏 가장 먼저 태양이 떠오르는 먼 동녘의 땅에서도, 가장 늦은 밤을 맞이하는 서녘의 땅에서도 이토록 찬란한 이름은 듣지 못했어요. 이런 아무 것도 없는 땅에서조차 계속, 끈질기게, 끝없이 불리우죠. 아마 영원토록 그럴 거예요.”

 

  필멸자들의 영웅은 본디 불멸의 이름을 갖는 법이니까요.

 

 

 

 

 

 

 

  11.

 

 

 

 

 

 

 

  “의도치 않게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놨네요. 너무 오랜만에 누군가와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겨서 그랬던 걸까요.”  

 

  다시 불기 시작한 모래 바람 사이로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그녀는 제가 가리켰던 황무지를 넓게 바라보았다가, 다시 사내를 보았다. 진중한 이야기를 꺼내놓던 낯은 이윽고 편안히 가라앉아 있었다. 설핏 여유까지 되찾은 모양새였다.

 

   “아,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 땅에 아무 것도 없다는 이야기는 거짓이었답니다. 설파를 위한 일종의 장치였다고 해도 나쁠 건 없겠네요. 그건, 제게는 사실일 테지만 왕님에겐 사실일 수 없으니까요.”

 

  “……뭐라고?”

 

  여자는 거짓을 고했다 말하면서도 뻔뻔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도 모르시는 거냐고 되묻는 듯이. 사내는 어쩐지 둔탁한 것에 얻어맞은 얼굴이 되었다.

 

  “저는 오래 살았고 많은 것을 경험했지만 총명한 존재는 아니에요. 왕님이 어째서 영생을 욕심내고, 인간을 사랑하는데도 어째서 삭풍이 되시고자 했는지조차……,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잖아요.”

 

  다만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지키는 것 뿐만이 아니라, 간혹 밀려올 북풍이 필요함을 늦게나마 깨달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너무나 먼 곳을 바라보기에 범인에게는 이해받을 수 없는 고립과 군림이 그녀에게는 그토록 애달팠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자신조차도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고는 확언할 수 없다. 그 간극 너머, 어딘가에서.

 

  “시간이 지나, 이제서야 겨우 보인 거예요. 하지만 왕님은 일견으로도 저를 꿰뚫으실 수 있어요.”

 

 

 

 

 

 

 

  12.

 

 

 

 

 

 

 

  그 눈동자, 저는 내다볼 수 없는 미래를 먼저 잡아채는 눈동자로.

 

 

 

 

 

 

 

  13. 

 

 

 

 

 

 

 

  “그렇다면 분명 이 땅에 무엇이 피어날지, 그리고 무엇이 생명을 품을지도 내다보실 수 있겠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그 눈동자라면.”

 

  사내는 그 순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땅에 도달하기까지의, 이 땅에 도달해 살아가는, 또한 이 땅에서 살아갈 여자의 모습. 그리고 지금은 어둠과 삭막함이 자리잡아 횡포를 부리지만 머지않아 이곳에도 피어날 생명까지도 사내는 볼 수 있었다. 기어코는 이 황야에마저 사람의 길을 놓는 인간의 가능성은 사내가 가장 어여삐 여기는 것.

 

  깊은 간극 너머에서도 이렇게 절실히 느껴지는 맥동이 있다.

 

  사내는 눈가에 와닿는 온기를 느낀다. 끝없는 삶을 사는 이보다도 먼저 찾아올 미래를 보는 그 눈동자는 제게 뻗어진 손과 팔을 지나 이윽고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손 끝의 온기처럼 따사로이 웃는 얼굴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해답을 지니셨던 분. 영생을 욕심내지 마세요.”

 

 

 

 

 

 

 

  14.

 

 

 

 

 

 

 

  그런 것 없이도 왕님은 이미 최초의 영웅으로서 불멸의 좌에 머무르고 계시니까요. 인류 최고最古의 이야기. 후세에 거듭 이야기될 영웅으로서 있으면, 당신의 책무는 달성돼요.

 

  그리고 그런 왕님은 앞으로 몇 번이고 영웅을 원하는 후대의 자손들에게 불리워지고 또 그 세계에 족적을 남기게 되겠죠. 그 시대마다, 왕님의 사후에도 멈추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지켜보세요. 아둔하게 멸망을 향해 간다면 따끔한 일갈을, 정해진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들이 결론을 찾아내는 날까지 따스한 눈으로 바라봐주세요. 

 

 

 

 

 

 

 

  15.

 

 

 

 

 

 

 

  단촐했던 짐은, 내려놓았던 순간보다도 빨리 꾸려져 사내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해답을 얻었으니 망설이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귀로를 서두르는 것도 당연한 수순. 여자는 아쉬워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억누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머지 않아 사내가 발걸음을 떼어낸다.

 

  “그럼, 돌아가마.”

 

  그녀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돌아가는 것이다. 제 손으로 다스려야 하는 땅으로, 그리고 그녀는 함께 할 수 없는 땅으로.

 

  그래도, 딱 한 번 쯤은 불러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저어, 왕님.”

 

  돌아보면 여자는 면구스레 웃는 낯이었다. 감히 영웅왕의 어전에서 잘도 교설을 늘어놓던 뻔뻔함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평범한 여식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마저 무뎌진 모양이다. 무언가 말하고자 하지만 어떤 객기도 불러모을 수 없어 망설이던 입술은 결국 본심과는 상극의 것을 내놓았다.

 

  간혹 다시 밟게 된 이 땅이 무료하실 땐 저를 찾아오셔도 좋아요.

 

  “아니에요, 아무 것도. 그저……, 무사히 돌아가셨으면 해서.”

 

  사내는 퍽이나 싱거운 녀석을 다 보겠다는 양 혀를 찼다. 더 할 말이 없다면 가겠다. 이어지는 것은 냉담하기까지 한 어투였다. 그리고 그 말처럼 서늘하게 등을 돌려 사내는 걸어나갔다.

 

  돌아보지 않는 등에 쓰게 미소짓는다. 하지만 탓해야 하는 것은 제 자신이었다. 기회는 단 한 번이었으며 스스로 그 기회를 놓친 것이었으므로. 멀어지는 꼿꼿한 등은 앞으로도 수많은 책임과 사명을 업은 채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이의 왕도를 방해하는 것은 할 수 없었다. 

 

 

 

 

 

 

 

  16.

 

 

 

 

 

 

 

  고개를 숙이던 그녀가, 돌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내 제 태양을 향해 미소짓는 얼굴이 있다.

 

 

 

 

 

 

 

  完.

 

 

 

 

 

 

 

  다시 만나러 오마.

 

  언제인가의 사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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