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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브리엘 레이브리엘x이데리하

이데리하는 초조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당장 오늘 마을을 떠나는 것이 좋았다. 비를 피하기 위해 누군가는 거적때기를 두르고 누군가는 우비를 입었으며 누군가는 머리에 고깔 같은 모자를 썼다. 그 모두가 방금 전 이데리하가 저지른 짓에 대해 입을 모아 중얼거리고 있다. 마리엘 엄마, 그거 들었수? 이 근처에서 사람이 죽었대요. 정말? 정말이라니까. 이 마을 근처에 사는 마물은 없다던데 무슨 요행인지 원... 쯧쯧. 이를 어째, 빨리 집에 가봐야겠어요. 마리가 빨리 돌아와야 할텐데... 그래요, 어서 가 봐요. 나두 오늘은 빨리 일 접고 가봐야겠구먼... 근데, 누가 죽었대요?
 근처 고급 여관에서 묵던 사람이래요. 보니까 지체 높으신 분 같았는데. 입고 있던 붉은 망토가 번지르르했다우. 금자수도 놓여져 있는 걸 봤는데 틀림없었어.
 냐아아.
 수다떠는 아낙들의 목소리 위로 고양이의 야살스런 울음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잠식해왔다. 그들이 선 골목 옆에서 살그머니 기어나온 까만 털뭉치가 이데리하의 발치로 얌전스레 걸어온 것이다. 아직 덜 여문 새끼인지 고양이는 이데리하의 발치를 한 바퀴 빙그레 돌다가 제 꼬리를 발견하고 어떻게든 그걸 잡아보려 애를 썼다. 이데리하는 그 고양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숨처럼 속삭였다. 저리 가라. 고양이의 천진한 울음소리가 약 10초 가량 발 가까이에서 이어지면 또 입을 열었다. 저리 가라구 혔어. 그리고 약 10초 경과. 앙증맞은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기가 팍 죽는 건 몹시도 순식간이다. 이데리하의 발 끝이 귀찮은 것을 치워내듯 고양이의 몸을 발 끝으로 걷어낸 것이다. 돌아올 것이 그보다 더한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그 어린 것이 야생의 감으로 날카롭게 짚고 줄행랑을 놓았다. 왔던 골목을 다시 돌아가는 꼬리가 완전하게 모습을 감출 때 그것이 슬피 우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이데리하는 제 옆에 선 소녀가 그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곧 그들은 마을 여관 하나를 잡아 1박을 하기로 결정했다.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마을을 떠나려는 그들의 뒷덜미를 노인의 염려 섞인 목소리가 낚아챘기 때문이다.
 "아이고, 설마 이 날씨에 다른 곳으로 가려고? 뭣 때문에 그리 가는 길을 재촉하는지 모르겠지마는, 오늘은 마을 어딘가에서 묵고 가는 게 좋을 거요. 다른 마을로 가려면 강을 건널 수밖에 없어. 지금 같은 날씨로는 자살행위지."
 몹시 내키지 않는 걸음을 다시금 마을로 끌어온 것은 소녀였다. 몇 번이고 해온 손짓으로 이데리하의 레인코트 소맷자락을 잡고 두어 번 잡아당겼다. 이데리하의 잿빛 섞인 붉은색 눈이 무표정한 얼굴 위에서 소리 없는 경고처럼 빛났지만 소녀는 손의 힘을 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데리하는 지친 표정으로 방문을 닫고 철저히 잠갔다. 옷에 튀었던 핏자국은 늘 그랬듯 빗물에 쉽게 휩쓸려갔다. 그가 부러 만든 거짓 비였다. 흘러가는 소나기를 가장해 철 냄새 어린 몸을 씻을 수 있다는 건 편한 능력이다. 세상의 많은 쾌락 살인마들이 이데리하의 그런 능력을 무던히도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그런 카테고리의 족속들과 함께 처박기엔, 그는 언제나 진물과 고름 투성이였으며 그럼에도 그 정도로까지 제 몸뚱아리와 영혼을 진흙 속에 투신해 살지는 않았다. 기실 그것만이라도 편하지 않았다면 시토우 이데리하는 지금처럼 그 생각보다 오래 연명치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연과 악연은 소박한 것들에 대해 관대하다.
 곁에 유령처럼 따라붙은 소녀가 이데리하의 코트 자락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긴다. 그가 팔을 조심스레 벌리고 서자 그녀는 이데리하의 코트를 공작하듯 신중하게 벗겼다. 공중의 빗물을 모으듯 신중한 소녀의 손길을 받으며 이데리하는 생각한다. 이 아이가 날 따라온 게 언제쯤부터였지. 아, 그래, 아마도 자고 일어나서 얼굴을 씻으려고 거울을 봤을 때 눈이 붉게 되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은데.
 소녀가 도도도 창가로 달려가 바깥을 한차례 살피고서 말했다.
 "샤워하러 들어가는 게 좋을 거예요. 지금 바깥에 이 마을의 치안대가 다니고 있어요."
 이데리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소녀는 그의 몸에서부터 허물처럼 벗겨져 늘어진 레인코트를 주워들었다. 구석 한 켠을 굴러다니는 커다란 바구니에 옷을 집어넣고 이데리하를 빤히 올려다본다. 욕실에 들어가 옷을 벗고 문 틈으로 놓아달라는 뜻이었다. 어둠이 침착된 눈동자로 이데리하는 소녀를 살폈다. 당연한 듯 등을 내보이면 연미 장갑을 낀 시종의 손이 숄을 걸쳐주고 다리에서 피로를 느끼면 홀연 의자가 준비되는 부잣집 아가씨같은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을텐데, 그녀는 허드렛일을 곧잘 먼저 나서서 하곤 했다. 나무 위를 기어올라가 익은 열매를 골라 따고, 숙박계를 대신 쓰고, 빨랫감을 모아 깨끗하게 만드는 일. 불현듯 공단 원피스를 걸치고 석벽의 저택을 흩날리듯 배회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데리하는 자신을 구성하는 성분 무언가가 서서히 으깨지고 재구축되는 감각을 느끼며 욕실로 소리없이 몸을 숨겼다. 몸에 꿰인 옷가지를 벗어 문 틈으로 던지고 완전히 문을 닫기 직전 그는 소녀의, 레이브리엘의 눈을 보았다. 나뭇잎과 산 틈을 헤집는 강의 색.
 한 때 시토우 이데리하가 가졌던.

 운이 좋은 날이면 온수가 나오는 여관에서 머물 수 있었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몸을 씻는 1차 목적을 충족한 이후에도 이데리하는 욕실 바닥을 포옹한 김에 취한 눈으로 떨어지는 물살 속에 몸을 맡겼다. 사고의 연상작용은 아직껏 남아있어서, 문득 이전에는 이런 온수가 당연하다는 듯 지급되는 시설에 몸을 의탁하고 지냈다는 사실을 가끔 떠올렸다. 사실 그 정도쯤 기본으로 해줘야 했다. 그건 '세계'를 지키기 위한 군대였으니까.
 별안간 밖이 소란스러웠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와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불협화음처럼 맞물려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데리하는 저도 모르게 샤워기의 물만을 그대로 틀어두고 수건을 챙겼다. 수건 사이에 숨겨둔 호신용 단검이 반짝 빛났다.
 "너같은 어린 여자애가 혼자 여행을 하고 있다는 말은 믿기가 좀 어려운데..."
 "속고만 사셨나... 거기다 혼자라는 말 한 마디도 안 했거든요? 전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어요. 절 주워주신 분을 따라다니고 있는 거예요. 지금은 휴식도 취하실 겸 욕실에서 몸을 씻고 계시지만요."
 "흠......."
 "아니면 주인님을 뵐 수 있게 욕실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드려볼까요? 못 믿으시는 눈치네."
 "아니, 아니다. 그럼 혹시라도 뭐 아는 게 있다면 나중에라도 말해다오."
 "예예, 왜 안 그러겠어요."
 비로소 남자들의 발걸음이 멀어져갔다. 복도 마루가 삐그덕삐그덕 기우는 소리가 멀어지고, 또 딴 방문을 노크 소리가 들린다. 그 모양을 확인하고서야 레이브리엘이 문을 닫는 소리가 났다. 이데리하는 그런 순찰이 무리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그냥 사람이 아닌 공중도시의 인퀴지터다. 입김이 셀 수밖에 없었다. 이데리하와 레이브리엘이 발걸음을 행하는 곳마다 모두 그런 식의 순찰이 이루어졌고, 그 일련의 과정들은 레이브리엘이 넉살좋게 받아넘겼다.
 이데리하는 숨을 천천히 고르고 단검을 칼집에 가지런히 꽂았다. 커다란 타월로 몸을 두르고 노크를 해 나갈 거라는 표시를 했다. 3초 쯤 기다리고 문을 삐그덕 열면, 역시, 이처럼 소녀가 갈아입을 옷을 테이블에 놓아두고 창 밖을 살피는 척 이데리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 이제는 의미도 뭣도 없는 제복 대신 낡은 셔츠와 긴 바지를 몸에 꿰며 이데리하는 레이브리엘을 바라보았다. 꼬마 레인코트와 검고 낡은 원피스를 상복처럼 걸친 여자아이. 레지멘트의 배신자이자 살인자인 남자의 꼬마 공범. 다만 이데리하는 생각했다. 그녀의 자질구레한 헌신들이 제 몸을 쪼개는 것이야말로 그를 위한 길이라 믿는 아가페이기만 했을 뿐이라면, 그녀와의 첫 동침에서 몰래 그녀를 내버려두고 저 혼자 길을 떠났겠지. 그는 머리가 좋았고 작은 동물처럼 예민했으므로 3383년 경의 시토우 이데리하가 그런 아가페로 정화되지 못할 짓을 했다는 사실 쯤 잘 알았다. 그런 과거가 등 뒤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졌고 눈이 혈옥수처럼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갔다.
 바지 버클을 채우는 소리가 끝을 맺고 나서야 레이브리엘이 등을 돌렸다.
 "치안대는 갔어요. 당분간은 안심해도 될 거예요."
 "그려... 알었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이전부터 생각했는디, 용케도 알아채는구먼."
 "당신의 몸이니까요. 나름 오래도록 봐왔어요."
 "......앞으로도?"
 "네?"
 이데리하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소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말랑한 살갗과 벚나무 가지 같은 팔다리와 조금씩 봉긋 자라나는 젖가슴이 품 속에 갇혀 온기를 발산했다. 현계로 떨어진 인형이 조금씩 진짜 인간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 가는 몸이 된다는 것은 어여쁜 꽃봉오리를 맺을 수 있는 관목의 한 생애를 보는 것과도 같다. 영원히 아름다울 수 없을 지언정 폭발적인 아름다움을 빛내는 순간이 저마다 있는. 아직 그 시기를 틔워보지도 못한 소녀가 제 품 안에 있는 모습을, 이데리하는 슬픈 듯 기쁜 듯 바라보며 날개뼈를 어루만진다. 레이브리엘의 날개뼈는 유난히 크게 느껴져서 날개를 앗긴 천사 같았다. 살인자이자 반역자이자 수호자인 청년은 고해성사하듯 아기 천사에게 뇌까린다.
 니도 알고 있을거여. 내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죽일거여. 위로 올라가는 것은 못할지언정 내가 막을 수 있는 죽음은 막을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헌티 손가락질 허드라두. 리즈나 디노 같은 애들조차 그러더라두. 내헌티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미어지는 애원과 척력이 동시에 도사리는 말을 레이브리엘은 노래를 듣는 듯 눈을 감았다. 아기천사의 작은 팔이 인도처럼 이데리하의 어깨를 감싸안고,
 "그럼 그런 당신의 끝까지 따라가는 게 저의 할 일이로군요."
 노래를 받으면.
 이데리하는 소녀의 입술을 더듬어 조심스럽게 키스했다. 가늘게 뜨인 눈동자 속에서 선홍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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