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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그너스X넬리2P

매그너스는 천천히 발자국을 따라갔다. 그의 것보다 훨씬 작고 보폭이 좁은 걸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강가의 모래흙이라서 자취를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한번 놓친 사냥감이었지만 서두를 것도 없었다. 어차피 그가 쫓는 소녀는 그에게서 쉽게 도망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소녀의 발자국은 어지럽게 널려 있어, 그 주인이 얼마나 다급하고 숨 가쁘게 도망쳤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멀리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소망이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매그너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달라붙으려고 애를 쓰던 녀석이….’

 

그녀의 이름은 넬리라고 했다. 오직 그만이 부르는 이름이었다. 본래 그녀의 이름은 매우 길고 거창했지만, 아무도 그 이름을 그대로 불러주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만큼 줄여서 넬이라고 한다고, 첫 만남에서 그녀는 말해주었다. 곱게 자란 계집의 이름치고는 지나치게 성의가 없다고 매그너스는 생각했었다. 그렇게 흰 피부와 동그란 눈과 분홍빛 뺨을 가진 여자아이에게는 좀더 귀여운 이름이 어울린다고. 해서 그는 이제 와서 스스로 떠올려 봐도 간지럽기 짝이 없는, 자신만의 애칭을 붙여주었었다.

 

넬리에 대한 기억을 되새길 때면 항상 가장 먼저 한쪽은 검고 한쪽은 파란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녀는 눈에 대한 얘기를 싫어했다. 그가 굳이 말을 꺼내면 대답은 해주었지만 한숨을 푹푹 내쉬기 일쑤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좋게 말하면 독특한 매력이겠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기이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매그너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처음 넬리를 알게 되었을 때 그녀가 참다못해 시선을 피할 정도로 뚫어져라 그녀의 눈을 쳐다봤었다. 단, 묘한 건 사실이어도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지만.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역시 허벅지까지 길게 드리운 머리카락이었다. 유달리 색이 진한 넬리의 흑발은 또한 남다르게 흰 피부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숱 많고 결 좋은 머리카락이 그의 눈앞에서 찰랑거릴 때면 어느 사이엔가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런 자신의 머리카락에 아무런 자부심이 없었다. 그녀는 금발이 되고 싶어 했다. 그녀와는 사뭇 다른 성격이라는 친언니처럼. 하지만 긴 머리를 계속 보고 싶으니 자르지 말라는 그의 말에는 순순히 따라 주었다.

 

따지고 보면 매그너스가 좋아하는 넬리의 특징들은 전부 그녀가 싫어하는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의 그 어떤 요소인들 그녀가 좋아했을까. 넬리는 심각하게 자존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매그너스 역시 빈말로라도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자신의 장점 정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 허나 넬리는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망가져 있었다. 하물며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다만 그녀는 매그너스와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웃었다. 그것은 절대로 억지웃음이 아니었다. 그저 그와 만난 것이 기뻐서, 그녀는 그렇게 항상 미소 짓고 있었다. 딱 두 번째로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첫 번째 만남에서 그에게 첫눈에 반했고, 잊을 수가 없어 목숨을 걸고 다시 찾아왔노라고 말했던 그녀는 그의 검 끝이 자신의 목을 누르고 있는데도 환희를 담아 웃었다. 본인의 생명줄인 스태프는 저 멀리 내팽개친 채로. 결코 기억력이 좋다고 할 수 없는 그였지만, 그 기억만큼은 조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뇌리에 새겨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태어나서 단 한 순간도 제대로 된 애정을 받아본 적 없었던 매그너스조차도 넬리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은 믿을 수 있었다.

 

또한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있었다. 넬리만은 결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하는 짓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그를 위한 짓이라면 무엇이든 저지르던 그녀였기에.

 

그래서 더더욱 지금 이 사태가 못마땅한 것이었다. 매그너스는 그녀가 자신을 피한다는 명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거겠지. 아니면 재미없는 장난질이라도 치는 거거나. 문득 오래 전 그녀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있잖아요, 매그너스.’

 

‘왜.’

 

‘제가 당신을 미워하게 될 날이 오기는 할까요?’

 

‘……그걸 나한테 묻냐. 굳이 대답하자면, 안 올 것 같은데.’

 

그의 대답에 넬리는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발랄한 종소리 같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그의 귀에 닿아 산산이 흩어졌었다.

 

‘맞아요. 안 올 거예요.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렇게 말한 주제에 도망이나 치고 말이야. 추억을 되짚다 예상치 못하게 부아가 돋고 말았다. 화풀이 한다고 봐주는 사람도 없건만 매그너스는 괜히 씨근덕대며 모래더미를 걷어찼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넬리는 심히 허약하고 운동신경도 둔했다. 그런 그녀가 한번 그를 따돌릴 정도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 따돌렸다고 말하기에도 어딘가 석연치 않기는 했다.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눈 깜짝할 사이에 아예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먼 곳으로 달아나 있던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꼴이란…….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갑자기 스타일 체인지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허나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현재 대단히 짜증이 난 상태였다. 발자국을 보면서 따라가느라 그 큰 날개를 가지고도 날 수가 없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기필코 넬리를 잡고 말리라. 매그너스의 머릿속에는 그러한 결심만이 가득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발자취를 쫓던 그는 이윽고 한 인영을 발견해 멈춰 섰다.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 그림자는 멀리서 보기에도 확연히 지쳐 있었다. 숨을 헐떡일 때마다 오르내리는 어깨가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로부터 도망치던 그녀를 놓아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다소 성급하게 다가가서일까, 넬리 역시 매그너스를 발견한듯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그리고 조금 비틀거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거리상 도망치기는 늦었다고 판단해서인지 그 이상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다만 똑바로 서서 그와 눈을 마주칠 뿐이었다. 여름날의 따가운 햇빛이 그녀를 눈부시게 비추었다.

 

나무는 보기 드물게 커다란 월계수였다. 나무줄기에 의지해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떤 신화 속 요정처럼 보였다. 치맛단 아래로 보이는 곧게 뻗은 다리에 눈이 갔다.

 

흐르는 꿀 같은 금발이 강바람에 휘날렸다. 선명한 청색의 두 눈동자가 그를 쏘아보았다. 앞서 한번 본 모습이었지만 매그너스는 이번에도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넬리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과 두 가지 색의 눈동자를 가진 꼬마 아가씨.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금발과 양쪽이 똑같이 푸른 눈의 소녀 역시 넬리였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정말로 인정하기 어려운 것은 눈이나 머리색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고 계속 스스로를 다독여왔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눈을 피했다가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역시 그대로였다. 넬리의 눈에 담긴 뚜렷한 적의는.

 

매그너스는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넬리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또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녀 역시 똑같이 멀어졌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채였다.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 대치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렇게 그대로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믿겨질 것 같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순간 매그너스가 손을 뻗었고, 넬리는 그의 팔이 자신을 향한 것을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그너스 역시 그녀를 따라 달렸다.

 

아까도 이렇게 하염없이 쫓고 쫓기던 둘이었다. 조금 전 그를 보고 일어났을 때에도 비틀거렸던 것을 봐서는 진작에 지쳐버린 것이 틀림없는 넬리였다. 허나 그런데도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마치 맹수에게 쫓기는 산양처럼 그녀는 달렸다. 원래의 그녀라면 이런 질주가 가능할 리 없었다. 평소의 걷는 것조차 어딘지 위태롭게 보이는 그녀와는 완전히 달랐다.

 

금발에, 양쪽이 같은 눈동자에, 건강하고 민첩하며,

 

‘…….’

 

그를 미워하는 넬리.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매그너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얄궂게도 일어나 버린 일이었다. 그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세상이 무너져도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던 일이.

 

그런 그의 혼란스러움과는 별개로 길었던 추격전도 슬슬 끝을 보이고 있었다. 애초부터 당연한 일이었다.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현격하게 빨라진 넬리였지만 그렇다 한들 인간일 뿐이었다. 다르모어나 검은 마법사로부터 받은 힘을 제외하고라도 본디 이름난 전사인 그에게 속도에서건 체력에서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 그녀의 머리카락이 코를 간질일 정도로 가까웠다. 매그너스는 이를 악물고 팔을 뻗어 넬리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러려고 했다.

 

그녀는 환영처럼 한 순간에 멀어졌다.

 

그는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그녀가 빠져나간 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그녀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손 안에는 따뜻했던 감촉마저 남아있었다.

 

털썩. 그는 모래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다. 다리에서 힘이 풀려 저절로 무너진 것이었다. 그는 손을 벌려 모래를 힘껏 움켜쥐었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갈 뿐이었다. 매그너스는 가슴 속이 무력감으로 차오름을 느꼈다. 아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굳이 그녀의 발자국을 뒤쫓아야 했던 것부터 말이 안 되었다. 그녀는 벌써 두 번째로 그의 손아귀를 벗어난 것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여러 가지 감정들이 그의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울화통이 치밀어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을 베어 버리고 싶기도 했고, 그저 가만히 허탈감에 몸을 맡긴 채 쉬고 싶기도 했다.

 

정신 차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가 다그쳤다. 그깟 여자 하나 놓쳐봤자 아무 상관 없잖아?

 

‘웃기지 마.’

 

땅바닥에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쓸데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손톱을 세웠다. 다시 한 번,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깟 여자가 아니야.’

 

그는 이제야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넬리는, 나의…’

 

나의, 연인.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말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녀는 매그너스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었다. 허나 그는 넬리와의 첫 만남을 기억조차 못했다. 두 번째 만남은 기억하고 있지만, 단순히 괴상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에게 고작 사랑을 인정받기 위해 무기를 내던진 멍청한 여자. 그러나 그 멍청함이 새롭게 느껴져, 싸울 때를 제외하고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다채롭게 만들어줄까 하는 기대감에 목숨을 살려주고 그의 성채에 출입을 허가한 것뿐이었다. 애정이나 연심이라고는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분명 그랬다.

 

“왜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누구든지 답을 알려줄 수만 있다면 답해 주길 바랐다. 아까부터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고 앉아 기분 나쁘게 그를 몰아세우는 목소리라도 좋으니.

 

“젠장, 왜냐고!”

 

그러나 그럴 리가 없었다.

 

어느새 날은 새까맣게 어두워져 별이 보이고 있었다. 매그너스는 실소를 터뜨렸다. 어지간히도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넬리를 쫓는 것을 포기하고, 뒤늦게 연심을 자각하자마자 밤이 오다니. 체념과 비탄으로 가득 찬 자신에게 너무도 딱 맞지 않은가.

 

절망. 평생 자신과는 연이 없는 단어라고 생각해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의지할 데 하나 없이 일족으로부터 추방되었을 때도, 증오스러운 카이저의 마지막 일격에 당해 생사를 오갔을 때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다.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라면,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몇 백 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 순간도 그가 원하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을 놓은 적이 없었다. 낯설기 짝이 없었다. 그를 미워하는 넬리도, 그런 넬리를 사랑하는 자신도, 그리고 여자 한 명을 얻지 못해 탄식하는 이 마음도.

 

매그너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게 물든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밝은 별은 한 개도 없었다. 전부 간신히 제 존재를 알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심지어 달도 뜨지 않아, 시각에 의지해서는 거의 주변 사물을 구분할 수 없었다. 설사 추격을 단념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하릴없이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내키지는 않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이대로 잠을 청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쉽지는 않았다. 심란한 가운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업무를 봤고 으레 하듯이 검 연습을 했으며 똑같은 스케줄대로 하루를 보냈다. 이런 괴이한 일이 일어날 그 어떠한 징조도 보이지 않았었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지내던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려 보니 언제부터인지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강가에 와 있었다.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인지 떠올려보려고 애를 써봤지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기억의 경계가 흐릿했다. 심지어 오늘부터 와 있었던 게 맞는지도 자신이 없었다.

 

그는 누운 채로 팔을 들어 올려 바라보았다. 조금 전 이 팔에서 넬리가 신기루처럼 빠져나간 것이었다. 텅 빈 팔 안쪽이 밤바람에 시렸다. 한동안 그렇게 쳐다보던 그는 이내 팔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벌이라도 받는 걸까. 매그너스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아서? 동료조차 배신하고 비겁한 방식으로 라이벌을 이겨서? 열망을 가진 자들을 속여 파멸시킨 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만들어서?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반성을 할 줄 아는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그는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후회가 없었다. 세상은 어차피 서로 속고 속이고 죽고 죽이는 아귀다툼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당한 쪽이 한심할 뿐이라고 그는 믿었다. 허나 단 한 명, 마음에 걸리는 인물이 있었다.

 

빅터. 사랑 때문에 그에게 이용당하고 영혼까지 사로잡힌 천재 화가.

 

‘이제 와서 그에게 미안해졌다고 한다면 비난받을까.’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차피 평생 알 수 없을 일이었다. 빅터에게는 더 이상 이성이 남아있지 않아서 사과하려야 할 수도 없었다. 캔버스 안에 갇혀 그림을 그리는 기계가 된 그의 마음을 지금에서야 헤아리게 되었다고 해서 과연 무엇이 변하겠는가.

 

또한 그가 생각하기에는 자신 역시 넬리를 잃었으니 같은 신세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땐 연인이 세상을 떠나 버린 빅터보다는 여전히 훨씬 나은 처지임이 분명했지만, 아직 매그너스는 실연을 그렇게 성숙하게 받아들일 만큼 어른이 되지는 못한 상태였다. 적어도 연심에 있어서는 철없는 아이와도 같은 그였다. 자신의 손 안에 넣지 못하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똑같이 여기는.

 

남은 것은 회한뿐이었다. 자신이 흔치 않은 행운아였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탓이었다. 대체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자신을 그렇게나 열렬히 사랑하는 여인을 얻을 수 있을까. 그가 조금만 더 일찍 자각했다면 넬리는 기꺼이 그의 여자가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의 앞에 놓인 삶의 길이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그녀와의 추억을 곱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매그너스는 넬리의 맑은 웃음을 다시금 떠올렸다.

 

‘맞아요. 안 올 거예요.’

 

그를 미워하게 될 날은.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다음에 한 말이 뭐였더라.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것은,’

 

매그너스는 눈을 번쩍 떴다.

 

꿈.

 

꿈일 거라고, 했었다.

 

그는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왜 아직까지 몰랐을까.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도무지 언제부터 왜 와 있는지 모를 장소부터 시작해서, 끝없이 이어지는 똑같은 지형.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제야 비로소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녀를 두 번째로 놓쳤을 때만 해도 머리 바로 위에서 밝게 빛나고 있던 태양은 그가 좌절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밤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어쩌면 넬리 역시 꿈을 꾸면서 그와 같은 공간에 와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녀가 평소 동경하던 모습대로 바뀐 것을 생각하면 그럴 법했다. 게다가 꿈속이라면 항상 그녀를 괴롭히던 허약한 몸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그의 감정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해 낮에서 밤으로 바뀐 세계가 넬리의 도망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그녀의 꿈속에서 그녀 자신의 의지로 벌어진 일이라는 설명 외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넬리를 찾아서 이 세계가 꿈이라는 것을 알린다. 그것이 정말로 그와 그녀가 깨어날 방법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시도할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는 희망으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갑자기 눈이 부셔왔다. 날이 다시 밝아오고 있었다. 하늘은 조금 전 검게 물들어가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도로 환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일출은 보이지 않았다. 일몰이 보이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매그너스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염원에 드디어 길이 열렸다. 아름답게 빛나는 하늘이 그 증거라고 매그너스는 믿었다.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고동쳤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할까?

 

‘또다.’

 

새로이 얻은 기쁨과 열망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그가 떠올린 생각이 아니었다.

 

‘너는,’

 

넬리를 두고 그깟 여자라고 표현해 날 열 받게 했었지.

 

‘대체 뭐야?’

 

눈앞에 불똥이 튀기는 듯했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분노가 가슴 속에서 끓어올랐다. 뿌득. 어느새 그는 이를 갈고 있었다. 아마 지금 그의 얼굴은 끔찍하리만큼 험상궂을 것이었다. 차마 넬리한테는 보여주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허나 불쾌한 목소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정체를 밝히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번에도 네게서 도망치면 어떻게 할 건데?

 

매그너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대답해. 그리고 강하게 힐문했다. 넌 뭐지?

 

“정체를 드러내란 말이다, 이 벌레 같은 자식아!!!”

 

그의 일갈이 허공에 산산이 흩어졌다. 메아리가 한동안 사방을 울렸고, 그 다음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강물 흐르는 소리만이 차분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물론 진지하게 대답을 바라고 소리를 지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동안 씩씩대며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이윽고 검을 고쳐 쥐고 반듯하게 어깨를 폈다. 더는 그 거슬리는 목소리나 스스로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더 이상 시간 낭비는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지.”

 

혼잣말도 가끔씩은 사기를 돋우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바로 지금 같은 때가 그런 때였다. 활짝 펴진 날개가 땅에 커다랗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종전에는 넬리가 남긴 자취를 관찰하느라 날 수가 없었다. 몸이 날 준비를 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녀를 발견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단 몇 초에 불과하더라도 그녀는 금세 사라졌기에. 하지만 모든 것이 마음가짐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안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넬리의 곁으로 향하길 강하게 염원하며 매그너스는 땅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 * *

 

넬리는 모래벌판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맨발에다가 심지어 다리가 드러나는 흰 리넨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달라붙지 않는 모래 덕에 의자나 깔개 없이도 편안하게 몸을 쉬일 수 있었다. 지친 다리가 바르르 떨렸다.

 

이젠 그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 사실만으로도 넬리는 안심할 수 있었다. 머리 꼭대기에서 따갑게 내리쬐던 태양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지고, 하늘은 벌써 한밤중이나 다름없이 어두웠다. 이 별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라면 그 누구라도 그녀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쫓기는 중이었다.

 

그녀는 그 남자를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 역시 마찬가지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그녀를 안다는 듯이 이름을 불렀고, 그녀가 겁에 질려 달아나자 쫓아왔던 것이었다. 그 커다란 체구, 그 무서운 얼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살아생전 그런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엄청난 체구에 날카로운 뿔, 거대한 날개와 번뜩이는 노란 눈까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는 어째서 그녀를 기를 쓰고 쫓아왔을까.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은 뭐가 어찌 됐든 그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실제로 그가 그녀에게 악의를 지녔는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순간 머릿속에서 어떤 모르는 목소리가 그녀에게 지시를 내렸었다. 그것은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라는, 아주 단순한 명령이었다. 그녀는 그에 순종했다. 그 외에는 그 어떤 선택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준족이었다. 그는 꼭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침착하게 그녀를 추격했지만, 그가 그녀를 잡으려 할 때마다 그녀는 무사히 그를 따돌릴 수 있었다. 물론 남자인데다 그토록 긴 다리를 가진 사람에게서 그리 어렵지 않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모로 의문이기는 했으나, 그의 손아귀를 뿌리쳐낸 이상 신경 쓸 필요 없는 사안이었다.

 

‘그렇다고 석연치 않은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뭐, 됐어.’

 

이제 그 무서운 남자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하고 싶었다. 머릿속이 그로 가득 차는 것이 불쾌했다. 그보다는 다른 것이 더 궁금했다. 예를 들면 이 기묘한 세계라든가.

 

넬리는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눈을 떠 보니 와 있었을 뿐이었다. 자고 있는 사이에 누군가가 그녀를 날라 오기라도 한 걸까. 혹시 그 남자가 그런 건지도. 그러나 눈 뜨기 전의 기억이 애매모호해, 과연 밤사이에 옮겨진 것이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스스로 걸어서 왔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혹은 수면제를 먹고 납치당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든 인과관계가 뿌연 안개처럼 희미했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아….’

 

보통 때였다면 상당히 꺼림칙하게 여겨질 상황이었다. 전후 기억이 모호한 채로 낯선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니. 하지만 어쩐지 지금 이 사태가 그다지 위험하다고는 인식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법 아늑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떠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이곳이 좋았다.

 

‘여기서 영원히 살고 싶어.’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은 당장에라도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온화해 보였다. 꼭 그녀더러 이리로 오라고 부르는 것만 같았다. 강의 폭이나 모래사장의 규모로 봐서는 거의 바다에 가까울 정도의 하류가 분명한데도 물은 무척이나 맑았고, 신기하게도 전혀 차갑지 않았다. 걸음을 뗄 때마다 사박거리며 발바닥에 감기는 흰 모래 역시 보드라워서 기분 좋았다.

 

넬리는 물가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빛이라곤 하나도 없는데도 왜인지 물에는 그녀의 그림자가 또렷하게 비치고 있었다.

 

어깨 위로 흘러내린 선명한 금발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녀는 풍성하게 굽이치는 허니 블론드의 머리카락을 허벅지에 닿도록 기르고 있었다. 물속에서는 푸른 눈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동글게 세공한 청옥 같은 두 눈동자가 양쪽이 조금도 다름없이 꼭 같았다. 넬리는 조금 더 가까이서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등 뒤로 넘겨두었던 숱 많은 머리채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눈 깜짝할 사이에 물에 풍덩 빠지고야 말았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머리카락을 꼭 짰다. 어떻게 봐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지나치게 길었다. 평상시에도 귀찮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결코 자를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좋아하니 자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누구였더라.’

 

어쩐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말을 성심껏 지켜온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녀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 어떤 얼굴이나 이름도 쉬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넬리는 어깨를 으쓱 했다.

 

‘아무렴 어때. 모른들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

 

그 사람이 누가 됐든 간에 적어도 이곳에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 생각은 놀랄 만큼 그녀를 안도케 했다. 그녀는 정말로 진지하게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상관없잖아. 내가 없어져도.’

 

굳이 누군가가, 이를테면 나를 이리로 데려온 이가 다시 날 내보내지만 않는다면, 이곳에 영원히 머물러도 되지 않을까. 넬리는 생각했다. 이곳은 춥지도 덥지도, 아프지도 두렵지도 않아.

 

…그 남자만 빼면.

 

다시금 공포심이 온몸을 뒤덮었다. 어째서 불유쾌한 생각은 떨쳐내도 떨쳐내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분 좋은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려고 있는 힘껏 노력했지만, 끝내 되씹고 마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목격한 그의 모습을.

 

‘…….’

 

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머릿속에 운석처럼 박힌 채 빠져나올 줄을 몰랐다.

 

‘어째서 그렇게 애타는 얼굴로, 내게 손을 뻗은 걸까.’

 

그 눈에 담긴 간절함이란.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을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아니, 헤아릴 수는 있었다. 다만 차마 인정할 수 없었다. 그 사악한―필시 사악할 것이다―인간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그런 얼굴이었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가장 애절한 모습이었다.

 

그녀를 향해 뻗던 팔에는 집착이 서려 있었다. 힘주어 악문 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형형하게 빛나던 호박색 두 눈이 띠고 있는 완고한 고집은 그녀를 꼭 잡고야 말리라는 의지의 발로였다. 그리고 그녀를 놓치던 순간, 그 고집은 애탄으로 바뀌었다.

 

넬리는 그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기 직전 무참하게 내달려 도망치고 만 자신을 떠올렸다. 죄책감이라도 느껴야 하는 것일까? 그녀는 생각했다. 적어도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운 것만은 확실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내보인 진심이었을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 누구라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달리는 와중에 그토록 실감나는 연기를 하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돌아서 도약한 순간 깨달았던 것이었다. 그 표정이 너무도 낯익다는 사실을.

 

상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극적인 표정을 어디에서든 본 적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흔한 기시감일까.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마음이 개운치 못했다. 분명 어딘가에서 그 얼굴을 접한 적이 있다고 가슴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것은 희끄무레하고 어지러운 머릿속 잠긴 문 사이로 새어나오는 기억의 한 조각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안 돌아가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 봐도 떠오르는 것은 더 이상은 없었다.

 

가만히 먼 곳을 바라보던 넬리는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가로 터벅터벅 걸어가 물에 손을 넣었다. 변함없이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강물이었다. 모든 것이 이렇게 단순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불평했다. 이대로 모래를 만지고 물장구를 치며 다른 일은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의 자신을 고장 난 축음기 같다고 생각했다. 그 표정에 대해 생각하기만 하면 머릿속에 노이즈가 끼는 것만 같았다. 무엇 하나 분명한 것이 없었다. 골똘히 생각에 몰두해 있자니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정신적으로 약간 지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장소가 아름답고 몹시 마음에 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녀의 마음에 피로를 얹어주고 있었다.

 

또한 스스로가 짜증스럽기도 했다. 찬찬히 따져 보자면 이해되지 않는 문제들투성이였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를 보자마자 그토록 미친 듯이 증오하고 두려워하며 도망친 것도, 그러면서 그 남자의 감정이 그렇게나 신경 쓰이는 것도.

 

‘게다가 말이 안 되지 않나. 어딘가에 그가 있는 것이 뻔한데 여기서 계속 살고 싶다니.’

 

더욱 황당한 것은 이 모든 감정들이 모두 진심이라는 사실이었다.

 

한번 생겨난 위화감은 모순점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의 그녀라고 해서 예외가 될 이유는 없었다. 되레 여태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해온 오류들이 한꺼번에 그녀를 덮쳐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이렇게까지 고민할 필요가 있는 문제들인 걸까. 아마 없을 터였다. 이미 태어난 감정에 이유를 찾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니까. 그러나 넬리는 왜인지 그렇게 속 시원히 결론지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렇게 판단하는 쪽이 합리적이라고 이성은 말하고 있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어째서인지 고집스럽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넬리는 몸을 일으켜 걷기 시작했다. 기억의 공백으로부터 오는 거슬림은 사실 처음부터 그녀의 곁에 있었다. 어쩐 일인지 이제껏 그것이 그다지 큰 일로 느껴지지 않아 무시할 수 있었지만, 지금 그 거슬림은 도저히 묵살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불쾌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녀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실마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기억은 마치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완고하게 그녀의 열람을 거부하고 있었다. 응당 주인이어야 할 그녀가 마치 불청객이라도 된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그 언짢음은 곧 불안이 되었다. 이 역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지만 마땅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으스스한 소설 속 이야기처럼 만약 그녀가 아주 나쁜 누군가, 가령 마녀에게 홀려 기억을 빼앗긴 거라면? 황당하고 밑도 끝도 없는 가정이었지만, 아주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런 이야기가 허구인지 사실인지조차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당연히 커져가는 불안감을 통제할 자신도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하늘은 이미 다시 밝아와 있었다. 혼란에 빠진 나머지 날이 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까.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양 팔로 몸을 감쌌다. 분명 여기는 춥지도 덥지도 않았는데. 허나 그녀는 바로 지금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이 환한 태양 아래서.

 

“누가,”

 

목이 메어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억지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길게 내뱉었다.

 

“날 좀,”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온 힘을 쥐어짜 말을 끝냈다.

 

“도와줘요.”

 

그 한 마디를 마무리하는 것만도 이렇게나 고단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돌아올 리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혼잣말을 한 셈이었다.

 

허나 바로 그때,

 

“그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넬리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바로 뒤에서 말을 걸어온 사람은, 당연하게도 그 남자였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몸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그녀를 묶어두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남자는 멈춰 선 그녀의 옆을 돌아 앞에 섰다. 눈앞에서 대면하고 보니 짐작보다도 훨씬 거한이었다. 키가 2미터는 족히 넘을 듯했다. 표정은 아까와는 달리 자신감이 넘쳤다. 또한 너무나 뜻밖에도, 어딘지 모르게 다정해 보였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가 두려웠다. 머릿속에서는 또다시 달아나라는 낯선 목소리가 윙윙댔다. 하지만 지금 목소리에 따르면, 이 세계와 그녀 자신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를 영영 잃고 마는 것이었다. 진심이건 아니건 그는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했으니까. 하필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고 겁을 내는 상대에게 매달리고자 함은 얄궂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호박색 눈을 다시 마주하고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당신은 누구예요?”

 

그는 자못 당황한 듯했다. 그로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질문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에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났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침착함을 되찾고 그는 대답했다.

 

“내 이름은 매그너스. 널 데리러 왔다.”

 

“날 데리러요?”

 

“그래. 널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러 왔지.”

 

꽤나 당당하고 시원시원한 답변이었다. 자신을 꺼리던 그녀를 충분히 보고서도 빙빙 돌리거나 의도를 뭉개지 않는 그 모습은, 찌를 듯한 패기가 엿보이는 외양과도 상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요? …그리고, 왜죠?”

 

둘 다 넬리에게는 무척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두 질문에 대해 확실하고 명료한 답변을 원했다. 머릿속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이제는 거의 윽박에 가까웠다. 그녀는 애써 목소리를 무시하며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넌 이 세계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나?”

 

“?”

 

“이 세계는 꿈이야.”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도 상상 외의 것이었다. 해서 그녀는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리는 것밖에는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고맙게도 그는 그런 그녀의 당혹을 어느 정도 헤아리는 듯했다.

 

“여기 오고 만 하루가 지났지. 그동안 뭘 먹거나 마셨나?”

 

“아뇨.”

 

“그런데,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른가?”

 

넬리는 눈을 깜박였다.

 

“……아뇨.”

 

“그리고 생각해 봐. 해가 지고 또 떠오를 만큼, 정말로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어마어마한 충격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러나 확실하게 그녀의 눈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 빨리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말이 되지 않아.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내게서 벗어나길 바랐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이건 꿈이니까,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하지만…,”

 

넬리는 고개를 숙였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세계에서, 대체 어떻게 탈출하면 좋죠?”

 

어느 시점에서 그녀가 이 강가를 싫어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분명 좋아했는데. 영원히 이곳에서 살고팠는데.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버린 감정이 그녀 자신도 황당했다. 게다가 언제 뒤집혔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으니 더더욱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허나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간단해. 꿈이라면 깨면 되는 거야.”

 

매그너스는 보다 힘이 어린 시선으로 넬리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그녀에게 호소하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너는 지금 거울에 비춰져 있어. 모든 것이 현실의 너와 반대지.”

 

뜻 모를 말들이었다. 그는 그녀가 혼란을 다스릴 틈도 없이 계속해서 기묘한 단어들을 쏟아내었다.

 

“넌 금발이 아니야. 흑단 같이 검고 비단처럼 매끄러운 흑발이지. 왼쪽 눈이 벽안인 건 맞지만 오른쪽은 검어. 지금의 네 새파란 오른쪽 눈은 네 것이 아니야. 그리고 넌 그렇게 산양처럼 잘 달리지 못해. 허약하고, 가냘프고, 운동신경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것이 진짜 너다.”

 

넬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강물에 비치는 그녀의 그림자는 대관절 뭐란 말인가. 여전히 굽이쳐 흐르는 꿀 같은 금발에, 바다처럼 푸른 양 눈동자가 똑똑히 보였다. 그는 그녀의 두 팔을 힘주어 잡았다. 다신 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무엇보다, 너는 날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어.”

 

그것은 선언과도 같았다. 무언가가 그녀의 안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그녀는 팔을 비틀어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다. 허나 단단히 움켜쥔 그의 손아귀는 풀릴 줄을 몰랐다. 매그너스는 그녀의 몸부림을 무시하고 넬리를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깨어나, 넬리. 너를 넬리라고 이름 지은 사람을 기억해내.”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동시에 넬리는 그녀의 안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어떠한 심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지어진 거대한 성채, 그녀를 부르는 어떤 무뚝뚝한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애정을 띠고 있는 그 억양.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은―

 

“매그너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신이었어요, 매그너스.”

 

어떻게 여태껏 기억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그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었다.

 

넬리는 그의 품안에서 겨우 팔을 꺼냈다. 그리고 주저 없이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다시는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를 사랑할 수 없는 세상은 그녀에게 있어 악몽과도 다름없었다. 바로 이 세계처럼.

 

“거기까지예요.”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그를 미워할 것을 종용하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그녀는 아직 같은 목소리가 매그너스에게도 절망을 소곤거렸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이 세계의 배후라는 것만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와 그녀를 가두고 농락한 몹쓸 여자. 두 사람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 여자였다. 넬리보다 나이가 많을까 적을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정성스레 안쪽으로 곱게 만 보랏빛 단발머리에 잘 어울리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명백히 악의를 띤 그녀의 미소가 두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유감이네요, 둘 다. 당신들에게 딱 맞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줬는데 말이지.”

 

매그너스는 옆에 있는 넬리가 화들짝 놀랄 정도로 소리 나게 이를 갈았다. 그의 증오심은 넬리의 그것보다 훨씬 큰 것 같았다.

 

“드디어 그 비싼 낯짝을 보여주시는군. 오늘이 네 녀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해라.”

 

평상시의 그보다도 훨씬 험악한 어조였다. 그러나 당연히 제지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매그너스 만큼은 아니더라도 넬리 역시 그녀가 사무치도록 미웠다. 당최 무슨 원한으로 매그너스에 대한 사랑을 잊게 했는지. 넬리에게 있어서는 세상의 모든 악심을 끌어 모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넬리와 매그너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손톱을 매만지며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글쎄, 그건 당신의 연인이 싫어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연인이라니. 넬리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순간 생각 없이 기쁨에 취할 뻔한 넬리였지만, 이내 정신 차리고 여자에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죠? 저는 매그너스가 한 말 그대로 이루어졌으면 딱 좋겠는데.”

 

“풋.”

 

여자는 소리 내어 넬리를 비웃었다.

 

“그렇지 않을걸요. 왜냐면 당신을 당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준 건 바로 나니까.”

 

매그너스의 팔을 붙잡고 있던 넬리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원하는 모습. 그 알쏭달쏭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넬리는 반박하지 못했다.

 

“언니와 같은 금발을 바랐죠? 아주 밝고 화사한. 기이한 오드아이 대신 이질감 없이 아름다운 푸른 눈을 원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픈 데 하나 없이 건강한 몸을 가지고 싶어 했죠.”

 

모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금의 넬리는,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인간상이었다.

 

“원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 모습으로 있게 해줄 수 있어요. 물론 이 세계 안에서.”

 

넬리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매그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조금 전과는 달리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넬리가 앞으로 취할 행동을 걱정해서였다. 여자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즐겁게 생글생글 웃었다.

 

“대신 두 사람은 떨어져 있어야 해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내가 매그너스에 대한 기억을 전부 가져가 줄게요. 그러면 아무 고통도 없겠죠? 아까 그랬던 것처럼.”

 

넬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침묵을 여자는 승리의 신호라고 여긴 듯했다. 도취감이 역력한 얼굴로 여자는 마지막 선고를 내렸다.

 

“그래요, 넬리. 아무 것도 슬퍼할 필요 없도록 내게 전부 맡기면 돼요.”

 

“날 넬리라고 부르지 마.”

 

“…?!”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활짝 피어 있던 얼굴에서 금세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건 매그너스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야.”

 

넬리는 시선을 들어 여자의 보라색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외쳤다.

 

“내게서 사랑을 앗아가지 마, 이 악몽아!!!”

 

그 순간, 세계가 흔들렸다.

 

* * *

 

매그너스는 눈을 떴다. 화창한 아침이었다. 창밖에서 새들의 지저귐이 정답게 들려왔다. 평소 기상시간보다 살짝 늦은 시간이었다. 머리를 흔들며 남은 잠을 몰아내고 매그너스는 침실을 나섰다.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침부터 여기서 뭐 하냐.”

 

주방에 들어서자 넬리가 달그락거리며 열심히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가 매그너스의 식사를 챙기는 것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고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아침부터 성채에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일어나셨어요?”

 

그를 돌아보며 수줍게 짓는 미소가 눈이 부셨다. 매그너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언제나와 같이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넬리는 쑥스러운 듯이 눈을 피했다.

 

“오늘은 매그너스가 더 많이 보고 싶어서요. 아침에 일어났더니 왠지 모르게….”

 

매그너스는 피식 웃었다. 그녀다운 이유였다. 세상에서 넬리만큼 그를 사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넬리가 음식을 가득 담아 준 접시를 들고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의 메뉴는 버터에 구운 감자와 연어 스테이크, 그리고 새콤한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였다. 아침에 금방 준비하기에는 꽤나 손이 많이 갈 법한 메뉴 선정이었다. 언제나처럼 맛도 좋았다. 한동안 주방에서는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치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꿈을 꿨어요.”

 

멈칫, 매그너스의 손이 동작을 멈췄다.

 

“…어떤 꿈이었는데?”

 

“모르겠어요. 깨고 나서 잊어버렸어요.”

 

“뭐야. 그럼 이상한 줄은 어떻게 알아?”

 

넬리는 식탁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얼굴로 대답했다.

 

“일어나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났거든요. 왠지…,”

 

“왠지, 뭐?”

 

“왠지 깨어나서 다행이었다는 기분이었어요. 뭔가 엄청난 악몽에서 겨우 벗어난 듯한…….”

 

매그너스는 다시 포크로 스테이크 한 조각을 찍어 입에 가져갔다. 잠깐 사이에 벌써 조금 식어버렸지만 여전히 맛있었다.

 

“깨어났으면 됐지. 더 생각할 필요 없어. 굳이 떠올려서 뭘 어쩌려고.”

 

넬리는 흐음 하며 매그너스의 얼굴을 살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를 꿰뚫듯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하나의 가설을 제시했다.

 

“악몽 꿨죠, 매그너스도.”

 

“…….”

 

“정말이구나?”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그녀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종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찰랑이듯이 그의 귀에 닿았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까지 똑같았다. 뭔진 몰라도 다시는 꾸고 싶지 않다는 것도. 거기다 어찌된 일인지, 그는 넬리를 보자마자 까닭 없이 안도감에 빠졌던 것이었다.

 

‘어쩐지 다신 너를 만나지 못할 뻔했다는 끔찍한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하지만 그것은 분명 사실이 아닐 터였다. 세상이 두 쪽 나지 않는 한 그와 그녀가 떨어질 일은 없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넬리는 그를 떠나지 않을 테고, 그 역시…

 

‘……웃기고 있네.’

 

매그너스는 칫 하고 혀를 찼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어오는 넬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린 뒤, 그는 남몰래 얼굴을 붉혔다. 아직은, 아직은 그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자비한 폭군 매그너스가 인간 소녀를 사랑한다고는.

 

두 사람은 때로는 웃고, 때로는 발끈하며 식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렇게 붙어 있을 예정이었다. 평소와 같이, 혹은 평소보다 조금 더. 그것은 두 사람의 아주 조금 달라진 일상이었다. 따스한 햇빛이 주방의 작은 창문 사이로 들어와 매그너스와 넬리를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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