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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 다이무스 홀든2p X 해나

다이무스 홀든이 돌아왔다. 풀벌레도 모두 잠들어 옅게 든 잠에 이불이 바스락대는 소리만이 가득한 새벽,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구세요? 잠긴 목소리로 건넨 질문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일이 끝나면 제일 먼저 네 곁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지. 연인의 역할은 금발이 부서지는 뺨에 입 맞추는 것으로, 회사의 유능한 에이스의 역할은 주어진 임무를 향해 떠나는 것으로. 남자가 입맞춤에 대한 답례로 받은 키스를 수차례나 돌려주는 여자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얌전히 안긴 연인의 앞머리를 매만졌다. 얼굴을 붉히고서 속삭이는 사랑 고백만큼이나 섬세하고 부드럽게, 머리칼 아래 꽃잎 색으로 물드는 곳까지 입술을 대고서야 허리춤에 매단 태도를 고쳐 쥘 수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디디기까지 몇 번의 각오와 단호함이 필요한지 그녀가 알 수나 있을까. 그런 잡념은 그의 표정에 떠오르기도 전에, 그녀의 아쉬움 섞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존재한 적도 없다는 듯 사라지고 말았다. 아직 전하지 못한 사랑은 돌아오고 나서 다시 너를 품에 안은 다음에 실컷 속삭이겠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슴에 안겨 오는 여자도 필경 같은 마음임을, 알아채는 일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이번에 돌아오면 훨씬 많은 시간을 너와 함께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들의 관계는 대체로 그가 그녀에게 맞추어 주는 편이기는 했으나, 그녀 쪽에서 먼저 보채는 일은 흔치 않았다. 대부분의 만남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연인들은 서로를 품에 안고 그간 모아뒀던 서로의 일상에 대해 속삭이기 바빴다. 모든 시간을 함께할 수 없으니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호흡을 확인하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그래서 다음에는 언제쯤 너를 만나러 올 것 같다고 언질을 줄 때면, 남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아는 가장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포갰다.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말랑하고 부드러운 살에다 제 흔적을 남기고 떨어질 때, 일부러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을 내리깔면 분홍빛 뺨을 더욱 붉게 물들이고서 눈을 데룩 굴리는 여자가 한가득 담긴다.

 

“그래, 다치지 않도록. 해나도 감기 조심하고. 날이 쌀쌀하구나.”

 

이제는 정말 가야 할 시간이군. 가느다란 허리를 안은 팔이 아쉬움을 채 숨기지 못한 채로 그녀의 팔을 쥐었다. 조금이라도 더 함께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는 경중이 없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에는 담지 못한 다짐이 있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에도, 다시 서로를 품에 한가득 끌어안을 때도 지금보다 더 많이 서로를 사랑하겠다는, 단 한 순간에도 변하지 않은 마음이었다.

 

***

 

오늘이면 오실까, 이틀이면, 사흘이면. 보고 싶다, 그립다고 몇 번을 보채면 혹여 돌아오지 않으실까.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어깨에 못난 심술로 부담을 얹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약속한 시일이 훌쩍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자에게 혹여 신변의 문제라도 생겼을까, 그리운 마음은 걱정으로 이어졌다. 일이 많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달빛도 비치지 않는 밤에는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들었다. 몸을 뒤척여 머리 아래로 상념들을 묻으려고 노력했으나, 제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는 밤은 마냥 서러웠다.

 

거친 손이 그녀로서는 쉬이 들기도 힘든 태도의 손잡이를 고쳐 쥘 때면, 그녀는 애써 좋은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일부러 그를 끌어안고 숨기지 못하는 표정을 가렸다. 가슴 앞에 잔뜩 벼려진 칼을 쥐는 일에는 그녀 스스로도 짐작하기 힘든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생채기 하나가 아프게 가슴을 찔러오는 일이 변하지는 않는다. 혹시, 혹시. 아냐, 말하면 그게 사실이 된다고 했어. 곤두선 신경이 그가 들락거리던 문을 향했다. 다치지만 않으셨으면 좋겠어. 오빠가 아픈 건 싫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너무나도 보고 싶어요.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요.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게 얼마 만이었더라, 기억을 더듬어 오늘처럼 사랑을 그리워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늦었다고 멋쩍게 문을 두드리며 늦었다고 사과하는 남자의 허리춤을 끌어안던 순간의 안도감. 이번에도, 그는 돌아와서 그녀가 느꼈던 만큼의 그리움을 사랑으로 바꾸어 줄 것이라고.

 

해가 지고서 한참이 지났다. 이제는 해가 뜨는 시간을 헤아리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또 늦게 잤느냐고, 뺨을 가볍게 쥐는 손길이 고픈 새벽이었다. 저 멀리서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보다 색색 내뱉는 숨소리가 더욱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한 밤에는 문밖을 서성거리는 소리도 귓가에 잘 들어오는 법이었다. 언제 잠들었지, 머리가 묵직한 게 저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대충 덮인 이불을 밀어내고 마루에 하얀 발이 끼익, 올라타도 문 건너편에서는 노크하지 않았다. 누구세요? 잠긴 목소리로 건넨 질문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혹시 나쁜 생각을 품고 지키는 이 없는 집을 찾아온 사람이면 어쩌지. 감이 좋은 남자의 연인으로 오래 지낸 탓인지, 어설픈 살기쯤은 알아챌 수 있었다. 허나 문고리에 손을 올린 순간 그녀를 붙든 께름칙한 감각이 그것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살기는 없지만,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항상 기대의 뒤를 쫓아다니던 그것이 기대보다 더욱 거대한 형태로 그녀를 집어삼킬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아주 작게 숨어있는 희망에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녀는 파들거리는 손을 애써 무시하고 문고리를 돌렸다.

 

후욱, 처음 들어온 것은 비릿한 피와 땀 냄새. 문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남자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머쓱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풍기는 냄새도 행동의 모양새도 그녀에게 익숙하지는 않았으나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무뎌지지도 않았다. 피 냄새에 숨어 다시금 그녀의 공간을 채우는 연인의 체취만큼 그리던 것이 또 있을까.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목소리로 전한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의 시선이 갈 길을 잃고 서성이는 것도, 꺼내지 못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잘 알았다. 결국, 뺨 언저리에 묻은 핏자국을 손으로 훔치기만 하는 그를 망설임 없이 끌어안았다. 피, 땀, 그리고 그의 살갗을 찢고 위협했을 금속제의 냄새들과 함께 사랑하는 남자의 그리운 냄새가 돌아왔다. 사내는 저를 끌어안는 연인을 미처 안아 줄 수가 없었다. 옷과 몸에 묻은 그와 이름 모를 적들의 피가 그녀를 더럽힐까 두려워서. 그저 달빛을 등지고 서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상처를 살피는 제 여자의 모습만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변화를 알아채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잡아주고 싶을 정도로 파들거리는 손이 그의 머리칼을 향했다. 그가 햇빛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과 그 끝자락의 벚꽃색을 좋아하는 만큼, 그녀도 달빛 아래에서 더욱 반짝이며 빛나던 은발을 사랑했다. 그리고 지금 다이무스 홀든은 그의 연인이 그러하듯, 목숨처럼 생각하는 이가 마음 아파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는 그녀가 사랑하는 색으로 빛나지 않을 머리칼을 하고서, 그는 몇 번이나 돌아올지 말지를 고민해야 했다.

 

한참 머리를 쓰다듬던 그녀가 손을 내려 수척해진 뺨을 쓸었다. 모든 것이 흐릿하게 캄캄한 밤, 작은 손가락이 그리운 사람의 얼굴 곳곳을 쓰다듬는 손길에 온 마음을 뒤덮은 불안함이 씻겨 내려갔다. 감히 그녀를 의심한 적은 없었으나 변해버린 모습에 혹여 두려움을 품지 않을까 걱정했던 일도, 전부 없었던 것처럼 위로하는 듯했다. 뺨에 깊게 자리한 흉터 위를 지나갈 즈음에는 울렁이며 넘치는 마음에 제 것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손을 찾아 쥐었다. 그리고 더, 더 깊은 온기를 찾아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둘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더 보듬어주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이 묻어나는 표정이, 나는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쌍의 커플이 기다림 끝에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으레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었다. 닿은 손을 끌어당기고 서로의 목 뒤에 손을 올려, 열 마디 말 대신에 맞닿은 살갗으로 서로의 진심을 섞는 일. 다이무스는 입술을 겹치기 전 습관처럼 눈을 감는 해나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음을 알아챘다. 어두운 표정은 그녀가 눈꺼풀 아래 눈동자를 숨겨버리는 순간 사라진 듯 보였으나, 가만히 포갠 입술을 몇 번이나 다시금 베어 물며 매달리는 행동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피의 형태를 한 다이무스 홀든의 불안함을 닦아냈음에도 여전히 그의 눈동자에서는 흉흉한 선홍색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장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속속들이 보이고 난 후에는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도 들었다.

 

한참 숨을 섞다가, 끌어안은 몸을 몇 차례나 고쳐 안기를 반복한 탓에 멀쩡한 옷과 피부에 검붉은 핏자국이 묻어났다. 그녀를 생각하고 위하며 걱정하는 마음은 엉망인 손으로나마 새하얀 그녀에게 묻은 얼룩을 닦아주게끔 했다. 소중히 여기고 보듬는 마음은 너나 할 것 없이 깊어서, 그녀는 말없이 그의 손을 붙들고 포근한 집 안으로 그를 이끌었다. 누구 것인지 모를 피로 범벅이 된 겉옷을 벗어두고 둘은 다시 서로를 끌어당겼다. 후끈, 따뜻한 체온이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당장 날이 밝으면 회사로 돌아가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를 올리고, 본가에도 마찬가지로 연락을 취해야 했다. 그러나 아직은 해가 뜨지 않은 깊은 새벽. 무엇보다 지금은 체력과 정신을 한계까지 소모한 육체가 휴식을 원했다. 조금만 더 이대로,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게 해 주는 여자를 품에 안은 채로 영영 해가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께에 겨우 닿는 자그마한 여자에게 온몸을 기대고 품에 파고들어 가만가만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검을 쥘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물러지고 마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안식을 주는 건 앞으로 절대 찾을 수 없겠지. 그러니 안은 팔에 힘을 주어 그녀의 곁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달콤한 휴식에 온 몸을 던져버린다. 사랑이 흘러넘칠 때마다 두 사람이 몇 번이고 그랬듯이, 두 사람은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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