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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루  아사노 가쿠슈 X 스즈키 치히로 2P

- 타 드림주 언급 有

- 원작 파괴 多

 

 

아라키 선배가 급히 처리하라고 말해 놓은 방송부 잔업이 끝나면 용케 남아 있던 1학년들에게 정리해놓은 서류를 부장 선배에게 전해 주라며 간단하게 몇 마디 지시를 한 후 학생회실로 간다. 뒤에 들리는 1학년 후배들의 서류를 정리하는 소리, 웅성대는 소리. 귓바퀴를 버릇처럼 손으로 한번 눌렀다 떼었다.

 

탁. 탁. 탁. 학생들이 모두 간 뒤의 텅 빈 교실은 구둣발에 채이며 울리는 바닥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1층, 2층, 3층... 올라가 이사장실 옆에 있는 학생회실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끼이익. 요란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면서 보이는 것은 여러 뭉텅이들의 서류에 쌓여 있는 아사노 선배. 아침 시간에 아유무와 이야기했던 내용이 갑작스레 떠오르기 시작했다.

 

*

 

“ 나, 아사노 선배, 좋아하는 것 같아. ”

 

마치 “ 난 오늘부터 살을 빼기 시작할 거야! ” 와도 비슷한 어조였다. 단지 내용이 충격적이었을 뿐. 평상시와도 비슷한 높낮이. 내용을 모르는 제 3자가 보고 있었으면 상대방의 반응이 더 지나치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 엑, 치히로. 진심이야? 너, 아사노 선배랑 사이 그리 좋지 않았잖아! ”

 

토오노 아유무가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이에 문제집을 풀던 몇몇 학생들이 조용히 하라는 듯 눈을 흘기자 그제야 아유무가 풀이 죽은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어서 그 질문에 대답하라며 들이미는 얼굴. 부담스러운 위치에 몸을 뒤로 조금 뺐다.

 

“ 좋아한지는 꽤 됐어. 말을 안했을 뿐이지. 그리고, 요즘은 사이 꽤 괜찮아졌는데? ”

 

아유무의 표정을 보니, 섭섭한 기색에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이미 아유무가 시오타 나기사라는 E반 선배 – 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종종 상담도 해 주었으니까. 오늘은 안되고. 내일 하교할 때 같이 파르페 가게에 가자고 살살 달래 볼까. 몸을 아유무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 네가 아사노 선배를 좋아한 지도, 화해, 아니 사이 풀린 지는 꽤 됐단 말이지? ”

 

내일 하교할 때에 파르페 가게에 가자고 말해볼 참이었다. 갑자기 들어온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아유무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그리고는 정적. 교실에는 아이들이 문제집을 푸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 그러면, 오늘 고백해! 학생회 잔업 많아서 늦게까지 남는 날이지, 오늘? ”

 

정적을 깨고서 아유무가 내뱉은 말이었다. 오늘 아사노 선배에게 고백하라. 말도 안돼. 오늘 고백하면 끝장이야.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 하지만, 나 오늘 꽃다발도 가져오지 않았고, 고백할 때나 쓰는 러브레터라거나 편지. 써본 적도 없는걸? ”

 

“ 종이는 빌리면 되고, 꽃다발은 준비 안해도 괜찮을 거야! 고백 멘트는 연습하면 되고. 아직 학교가 끝나기까지의 시간은 많이 남았잖아. 그치? ”

 

머릿속을 치고 들어온 아유무의 말은 내 머릿속에서 요란스럽게 울리던 사이렌 소리를 묻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늘은 공부 안해도 되는 날이야! 따라와 치히로! 부산스레 손목을 잡아끄는 아유무의 손길에 못 이기는 척 발걸음을 내딛었다.

 

*

 

아사노 선배를 언제 좋아했나고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왜, 소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 – 아유무와 몇몇 반 친구들은 이 사이를 악연이라고 칭했다 – 인데, 싸웠던 적도 있고, 호감을 가졌던 적도 한번 즈음은 있지 않겠는가.

 

나, 스즈키 치히로는 선배에게 소학교 5학년 때에 고백하고 보기 좋게 차인 뒤, 혼자 열내고 폭발하여 상대방에게 날을 세운 경우에 속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지만, 아홉 번을 더 고백하기에는 도저히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 후로는 가끔 아사노 선배에게 화도 냈고,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물론, 중학교 2학년 초에 암묵적으로 화해는 했다지만 도저히 고백할 상황은 아니었다.

 

*

 

아사노 선배를 앞에 두고 손톱을 깨물었다. 글씨 쓰기를 멈춘 선배가 할 말이 있냐는 듯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보랏빛 눈이 날 쳐다보기 시작하자 나오려던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체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 스즈키 치히로.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

 

딱딱 끊어지는 말투였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던 목소리. 내가 아마 소학교 때에 아사노 선배에게 고백했던 이유에는 그 잘생긴 외모도 한몫했겠지만 아마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에 한 번에 반했기 때문이리라.

 

“ 아사노 선배. ”

 

아사노 보다는 선배라는 단어를 더 길게 잡아끌었다. 서류로 되돌아가려던 눈이 다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숨을 한번 들이 내쉰 뒤에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 좋아했어요. 아니, 아직도 좋아한다는 게 맞으려나요? 으음, 아무튼요. ”

 

사이가 어정쩡했어도 이 스즈키 치히로는 아사노 가쿠슈 선배를 좋아했답니다. 이어지는 말은 목구멍 속으로 다시 쑤셔 넣었다. 선배의 눈이 약간 더 커졌다.

 

“ 그래도, 사귀는 건 무리일거예요. 그쵸? 암묵적으로 화해는 했다 해도, 아직 우리는 정식 화해를 하지 못했잖아요. ”

 

아유무 미안. 오늘은 진짜배기 화해를 하고 나서 다음에 고백해야 할 것 같아. 속으로 내가 보낼 메일만 기다리고 있을 아유무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이 텔레파시가 아유무에게 갈 일은 없겠지만.

 

“ 제가 그때 선배에게 잘못한 건 맞고. 죄송하게 생각해요. 저 멋대로 선배에게 화낸 거요. ”

 

아사노 선배가 고개를 슬쩍 끄덕이는 게 보였다.

 

“ 그래서, 그냥 죄송하다는 이야기 드리고 싶었어요. 네. 그냥요. 별 생각 없었답니다. ”

 

*

 

끼이익. 듣기 싫은 문 소리가 나면서 문이 닫혔다. 대답도 듣지 않고선 도망치듯이 문을 닫다니. 고백은 무슨. 그냥 사과드린 것만으로도 다행히 생각하자. 핸드폰만 붙잡고 있을 아유무에게 메일을 보냈다. 고백은 안하고, 정식 사과만 하고 왔다는 이야기. 곧바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지만 무시한 후 바로 꺼 버렸다.

 

*

 

집에 도착하니 하늘은 벌써 어두컴컴해져 있고,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추운 바람이 애써 정리해둔 앞머리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가디건 대신 마이를 걸치고 등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 문을 열었다.

 

그래도, 용기내서 사과를 했으니까. 뿌듯한 하루였어. 그치?

 

“ 다녀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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