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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잉 코브라2PX은

더블사이즈 침대에서 성인 남자 두 명이 마주보고 앉아있는 모양새는 누가 봐도 어색함에 숨이 막힐 법 했다. 정적만이 가득한 방에서 에릭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당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하룻밤 사이에 제 동료의 머리와 눈이 새하얘졌을 리는 없었다. 그의 사고를 듣자니 그건 또 찝찝하고. 저도 모르게 학습된 교육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의 사고를 듣는 것은 그랬다. 열지 말아야할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도 같아서, 사고를 들은 본인이나 들켜버린 그나 마찬가지로 무슨 후폭풍에 휘말릴지 몰랐다. 어떻게든 본인을 싸매려고 드는 그였기에 평소에도 자신이 듣지 못하도록 마법이라도 걸어둔 것이겠지만. 어쨌건 그의 머리가 핑핑 돌아 마법이 풀리지 않는 이상 그의 사고를 자의로 들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런 마음을 먹은 적도 없었고. 언제나 제 귓가에 머무르던 것은 그의 호흡과 맥박 뿐. 어디에 있던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 그 소리와 향이 있었건만. 에릭이 짧은 잠에서 깨어든 원인이었다. 미묘하게 달라진 호흡소리가 신경을 건드렸다. 깨어나 옆을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웬 백발의 남자가 등을 돌린 채로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할 따름인가.

잠에서 깨자마자 벌어진 괴이한 상황에 할 말을 잃은 건 둘 다 마찬가지. 자신을 은이라고 주장하는 백발의 남자는 곤란한 듯 귀에 걸린 제 금색의 피어싱을 매만졌다. 상황파악을 하는 건지, 할 말을 고르는 건지, 제 앞의 있는 그의 말을 기다리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에릭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온통 새하얗기만 한 옷에 포인트를 주는 것은 푸른 넥타이와 머리핀, 정도였다. 남자의 말마따나 은과 아주 똑같은 얼굴에 치구이긴 하지만, 기억 속에 있는 이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전체적인 색의 차이일까 싶었으나 비단 그것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제일 결정 적인 것은 그의 향이었다. 은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장미향이 백발의 그에게서는 나지 않았다. 좀 더 청량하고 깨끗한…. 아니, 굳이 제 앞에 있는 사람의 향을 기억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제가 아는 은이 아니었다.

 

“어디 말이라도 해보지 그래.”

“난 이미 내 소개를 했다, 은이라고 했잖아. 에도라스의 은. 네가 있는 이 세계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뭐?”

“설마 모르는 건가? …아, 뭐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기야 했지.”

 

어스랜드라고 불리는 이곳과는 평행을 이루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 어찌 보면 거울 세계와도 같은 곳, 에도라스. 은이 퍽 거만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렴 제가 듣기만 했을까. 몇 년 전-기억이 가물가물 할 시점이지만 햇수는 보낸 것 같았다-에 있었던 왕위 교체의 배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세계의 페어리 테일이 자신이 있던 에도라스를 어떻게 바꿔버렸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몸이 그런 같잖은 연극에 놀아날 리 없지. 제 입장에서는, 어스랜드가 에도라스와는 반대되는 세계였다. 어느 쪽으로 말하든 의미야 같겠지.

어스랜드는 영원한 마력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저들이 그 영원한 마력을 빼앗으려고 했던 곳이었다. 장렬히 실패했지만. 은은 과거 기억을 더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지금은 추방된 선대왕을 지지하며 영원한 마력을 추구했던 그의 입장으로서는 예나 지금이나 그 실패가 퍽 고까울 따름이었다. 이제 마력이라는 것은 구경도 할 수 없는 판국에 무슨 미련한 생각인가 싶었으나 그렇지 않은가. 마력이라는 것이 어찌나 탐스러운 것인지.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던 은이 문득 에릭과 눈을 마주치곤 하던 말을 멈추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다 말했으니 다음은 네가 내게 말해줄 차례군. 나만 말하기는 불공평하지 않겠나. 넌 이름이 뭐지?”

 

은이 느긋이 웃으며 에릭을 쳐다보았다. 물어보지도 않은 데 까지 혼자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대뜸 불공평이라니 제멋대로인 것에도 정도가 있지. 왜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졌는지 이제 좀 알 것도 같았다.

 

“…에릭. 네 놈이 여기,”

“아아, 역시 리키인가~ 이쪽이 좀~ 더 험상궂게 생긴 것 같군.”

“리키라고?”

 

에릭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에도라스의 자신을 말하는 것일 텐데, 호칭에서 역겨움이 느껴질 따름이었다. 리키라니, 저 쪽의 은은 저를 그런 호칭으로 내내 부른단 말인가.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않는 자신들에게는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너는 그런 호칭으로 그 쪽의 나를 부르는 거냐?”

“그래, 리키. 귀엽지 않나? 내가 지은 애칭이거든. 그러는 그 쪽의 나는 리키를 뭐라고 부르지?”

“…너.”

“…그럼 넌 나를 뭐라고 부르는데. 아까처럼 네 놈, 같은 그런 건 아니겠지.”

“애초에 애칭 같은 걸로 부를 각별한 사이도 아니라고.”

 

에도라스의 은이 짐짓 큰돈이라도 잃어먹은 얼굴로 초점을 잃은 시선으로 정처 없이 바닥을 훑었다. 아무사이도 아니야? 너와 내가? 그의 손에 이불이 말려 들어가며 주름이 졌다. 똑같은 얼굴이고 똑같은 사람이매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수 있나. 둘 다 똑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리키가 얼마나 집착 있는 놈인데. 다른 세계에서도 분명히 날 잡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냐, 그건. 저 쪽의 나는 너와 사귀기라도 하는 건가?”

“당연한 거 아니야?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리키라면 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거라고. 당연히 그게 맞는 거란 말이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가? 날 좋아하지 않아? 그럼 이 침대의 한 명은 누군데?”

 

은이 꽤 절박한 얼굴로 에릭의 어깨를 잡아오며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극도의 애정을 갈구하는 눈빛. 억제된 것이 아니라, 숨김없이 오롯이 저를 바라는 눈을 하고 있었다. 몇 십 년 저와 같은 세월을 보냈던 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얄밉게도 저 쪽의 은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정말로 제가 말했듯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분명 지금까지 은에게 마음이 있었고 같은 침대를 쓰고 있던 것도 은이 맞다. 그렇다고 해서 저 쪽의 은처럼 각별한 사이인 건 또 아니다. 애매하고 애매한 거리의 관계.

만약 이 쪽의 은이 제 눈앞의 은의 성격을 반만이라도 따라갔다면, 어쩌면 그가 말하는 대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을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믿어줬다면, 받아들여줬다면. 조금이라도 본인에게 상냥해질 수 있었다면. 그럴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철저하게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는 것에는 화가 났으나 은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싫은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 서투를 뿐. 이제야 조금씩 제게 흔들려 가는가 싶었더니 이런 사황이라니.

 

“그건 됐어, 네 놈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어떻게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닐 수가 있,”

“그보다, 네 놈이 여기 있는 거면 이쪽의 은은 어딜 간 거지?”

“…치사하게 사람 말을 끊고. 나도 몰라. 뒤바뀐 거라면 내가 있던 세계에 있지 않겠나.”

“돌아가는 방법은?”

“알 리가 없지.”

 

돌아가는 방법도 모르면서 어찌 저리 태평한 태도인가. 은은 제 머리를 검지로 베베 꼬아가며 뚱한 얼굴을 했다. 어떻게 리키가 날 안 좋아할 수 있는 거냐, 라며 꿍얼꿍얼 궁시렁대기 시작했다. 은의 얼굴을 하고 있기에 그마저도 귀여워 보인다고 생각하다니, 어떻게 되었다고 여겨도 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은이 아니었다. 뒤늦게야 몰려오는 창피함에 마른세수를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성격과 색의 차이는 있으나 어쨌든 제 눈 앞에 있는 사람도 은이었기에 마음이 동한 것인가. 아주 우스울 따름이다.

 

“그 쪽의 나는 어떤 놈이지?”

“리키? 우리 리키로 말 할 것 같으면 상냥하고, 다정하고…”

“켁, 괜한 걸 물었군.”

 

에릭은 혀를 차며 그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저 쪽으로 가버린 은의 옆에 있을 자신은 어떤 사람일까 조금 궁금했을 뿐이었다. 다른 세계라고는 하나 그래도 나 자신. 그에게 상처를 입힐 사람은 아닐 터였다. 그의 말이 거짓말도 아닌 모양이니 적잖게 다행이지만 만약 그럴 인물이라면…. 에릭이 힐끔 그를 바라보자, 은의 눈이 끔뻑끔뻑 감겼다 뜨였다를 반복했다. 

 

“지금 저 쪽으로 가버린 날 걱정하는 건가? 그래서 물어본 거지? 우리 리키가 어떤 사람인지.”

“누가 그 놈을,”

“걱정 없을 거다. 오히려 널 걱정하는 게 좋지 않나? 그 쪽의 은이 우리 리키에게 빠져버리기라도 하면 나도 곤란하고 너도 곤란할 텐데.”

“아앙?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리키는 언제나 나를 좋아하게 되어있다. 그런데도 이쪽의 너와 내가 아무사이도 아니라는 건, 그냥 네가 이쪽의 나를 혹하게 할 정도의 매력이 없는 거 아닌가?”

“시비 터냐, 지금?”

“문제점을 짚어주고 있을 뿐인데.”

 

아아, 성가시다. 성가신 놈이다. 에릭은 구겨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뻔뻔함과 자만심. 억지로 자만심을 칠해 자신을 보호하려 드는 그의 거짓과는 차원이 다르다. 제 앞의 은의 얼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없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은만 아니었더라도 짜증나는 스타일이라고 확신했을 터였다. 매력이 없다? 남의 속도 모르면서 주절거리기는. 차라리 그런 이유에서였다면. 같은 감정을 가지고도 저의 감정만 부정 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그는 알 길이 없겠지.

은은 대꾸 없는 에릭을 보며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에릭이 잠깐이라도 제게서 한 눈을 파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은 앞에서 그런 것이 중요한가. 당장의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하는 그가 못마땅했다. 제 에릭이라면 이렇지 않을 것을. 자신의 기준에서 어스랜드의 이 에릭은, 전혀 눈곱만큼도 섬세하지 못한 남자였다. 에도라스의 은은 어린 아이 같은 면이 있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자신의 잣대를 남에게도 들이대는 것도 모자라 청개구리 같은 면도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어린 왕. 어스랜드의 에릭은 그런 어린 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나 제안하건대, 이대로 돌아가지 못하면 나랑 사귀는 건 어떤가?”

“그 쪽의 네 놈과 나는 이미 그런 사이라며. 그 놈을 버리겠다고?”

“버리다니 무슨 섭한 소릴, 어쩔 수 없잖아? 어차피 같은 은이고. 분명 리키도 그 쪽으로 가버린 나와 사귀려고 하지 않겠나?”

“쉽게도 말하는군.”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에릭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할 참이었다. 에도라스의 은의 사고회로는 어떻게 돼먹었기에 저런 소리를 뱉는 건지, 에도라스의 자신은 어떤 놈이기에 똑같이 행동할 거라 믿는 건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 보통, 이런 일이 생기면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먼저 아닌가. 그런 일이라면 저도 도와줄 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저 태도. 저 발언. 에도라스의 저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 맞기는 한가.

 

“우리 리키는 겉으론 그래도 꽤 매정한 사람이라서, 너도 다를 바는 없겠지. 너한테 필요한 게 이 은이라는 존재라면 그 쪽이나 이 쪽이나 상관없을 텐데. 슬슬 인정하지 그래?”

“인정하고 자시고, 나한테 필요한 건 그 녀석뿐이라고. 그래선 대용이랑 다를 게 없어.”

 

자신의 은이 제일 무서워하는 말이었다. 대용, 대용. 안 그래도 하필 그 단어 때문에 1년 전부터 지금까지 엄청난 수고로움을 겪고 있건만. 제 대답에 입을 다문 은이 그 새하얀 눈으로 저를 응시했다.

 

“너, 나 진짜 좋아하나보다.”

 

아차. 이번에는 에릭의 입이 다물렸다. 은은 입꼬리를 슬 올린 채 검지로 그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럴 줄 알았어. 당연한 일이지. 은의 웃음은 만족스러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원래 이래야했다. 에릭은 은을 좋아하고, 은 또한 에릭을 좋아한다. 은은 흡족히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무언가의 말을 뱉기 전에, 은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어라, 돌아가는 것 같군.”

“빨리 꺼져.”

“이 쪽의 리키는 말도 곱게 못하는 건가, 정말 매력 없는 남자라니까. 얼굴이 아깝군.”

“가는 길까지 사람 성질 긁는 게 네 놈의 인사 방식이냐?”

“고백도 못한 멍청이 속은 좀 긁어도 돼.”

 

은이 장난스레 웃으며 쏘아붙였다. 에릭은 질렸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그를 내쫓는 시늉을 했다. 정말 답답한 인간들이군, 어스랜드의 사람이란. 우리 쪽이 훨 배는 낫겠어. 은은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빛이 점멸하고 사라진 뒤에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침대 위에 널브러진 어스랜드의 은이 있었다. 돌아왔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은은 제가 알던 에릭을 보고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온 것에 안심한 듯 푸욱, 몸의 힘을 풀었다. 그 탓에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 한 것을 에릭이 잡아채 앞으로 끌어 올렸다. 하하, 진짜 지치겠군. 은이 피곤한 얼굴로 그의 팔을 잡고 중얼거렸다. 나도 지쳤다. 에릭의 초연한 답이 이어졌다. 역시나 저가 알던 낫다. 차마 입 밖으로 뱉진 못했으나 생각하는 것은 둘 다 같았다. 내가 알던, 나의 사람. 어느덧 피곤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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