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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님 매그너스X르네2P

그 여자는 독이다.

 

 

새하얀 두 손이 꽃잎처럼 부드럽게 팔랑거린다. 꽃물이 든 듯 발간 뺨, 만개할 무렵의 장미처럼 물기를 머금은 입술이 달콤한 숨을 담고 달싹였다. 벌어진 입 사이의 하얀 치아, 실없는 단어를 더듬는 붉은 혀끝이 잇새로 살짝 비추었다 사라진다.

지독히도 선정적이었다.

폭군은 깊은 한숨을 마른침과 함께 삼켰다, 목울대가 크게 울렁이는 순간 식도를 타고 넘어간 한숨이 메슥거리는 욕망과 함께 명치 부근에서 꿈틀거렸다. 언뜻언뜻 피가 끓는다, 혈관이 폭발할 것처럼 뜨거웠다가 더없이 차가워지고 이내 미친 듯이 부글대며 덥혀지곤 했다.

그를 침착하지 못하게 하는 병증이 성호를 그으며 온 몸을 순교자마냥 선회한다, 끔찍하게도 악질적이고 또한 그러나, 유일하게 그가 어쩌지 못하는 것.

 

귓가에 가벼운 바람이 닿는다, 솜사탕을 통해 불어넣은 숨처럼 달짝지근하고 더운,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리는 불쾌한 감각. 천천히 귓바퀴부터 등의 가운데로, 시큰하게 시린 감각이 척수를 타고 흐른다. 동시에 다가온 것은 지독하게 다디단 향기였다.

인지한 순간, 몸이 달았다. 끈적하게, 끔찍하리만치.

 

 

“아마 못 들었던 모양이네, 그렇지?”

 

 

매그너스는 환상에서 깨어난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온통 사라질 듯 희미한 하얀 꽃을 바라보던 시야에 급작스레 새빨간 눈동자가 들이밀어진다, 겨우 그것뿐인데도 가슴께가 오싹해 움츠러든다, 그 사실에 그는 더없이 자존심이 상했다.

몸속에 불타는 얼음덩이를 집어넣은 것 같았다, 정신은 얼얼할 정도로 홧홧하고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른다. 싸하게 내려앉은 심장이 겁이라도 먹은 듯이 온 몸을 울리는 소리가, 매그너스 자신에게는 전장의 소음보다도ㅡ 칼이 부딪히는 소리, 터져 내리는 불꽃, 땅과 충돌하는 운석의 굉음, 침입자의 마지막 숨이 회색으로 꺼져가며 바닥에 녹아내리는 소리보다도 끔찍하게 폭발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그가 겪은 그 어떠한 전장에서도 이렇게나 공포에 질린 적이 없다. 

 

시끄럽게 쿵쾅거리는 소리가 터져 내리는 귓가에 익숙한 웃음소리가 더해진다, 머리가 아프다, 독 연기를 가득 들이마신 것보다도 폐가 답답하게 쑤셨다. 그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목이 탄다. 심장이 뜨겁게, 끈적끈적하게, 조금씩 녹아 목 안에서 비틀거렸다. 입 안에서 단내가 난다.

조금 머뭇이다 다시 들어 올린 시야에서 그 여자는 웃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는 늘 그런 표정이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전부 알고 있다 주장하는, 그의, 폭군의, 매그너스의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그 의심 하나 없는 오만함. 그러나 그가 분노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자그마한 의문조차 품지 못할 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소 지은 그대로 가볍게 눈썹을 추켜 올린 여자는 이내 더없이 온유한 표정으로 사르르 눈을 휘었다. 녹아내릴 듯이 달콤한 미소는 그의 몸에 불을 붙이고는, 갈증 난 그의 입술에 단 한 방울의 물조차도 허락하지 않은 채로 천천히 멀어졌다. 마른 혀끝으로 와 닿는 공기는 괴로울 정도로 끈끈하다ㅡ, 그 부덕한 입술에 넋이 팔려 채 알아듣지 못한 말이 다시 한 번 아주 느릿하게 반복되었다.

 

 

“피안화를 보고 싶어.”

 

 

피, 하고 혀끝이 살짝 밀려들어간다, 잇새로 새어나오는 숨소리가 어린아이를 달래는 소리처럼 늘어져 채 사라지기도 전에 새 글자가 배어나왔다. ㄴ, 하고 아랫니와 입천장 사이에 꾹 눌려 부푼 혀가, 하얀 이 사이로 더없이 말랑말랑하게 짓눌린 빨간 혓바닥, 화, 하고 살짝 오므라들었다 숨결을 뱉으며 퍼져나가는 보드라운 입술.

 

하나하나 녹아가는 덧없이 사랑스러운 단어, 연기처럼 흩어지다 모여드는 언어의 색상, 단어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끝나며 말이 되고서도, 그의 회색 시야에 하얀 말이 퍼지기에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피안화?”

“응, 보고 싶어, 그러니까 가져다 줘.”

 

 

그러고는 빙긋이 웃는다.

너는 나를 대체 무어라 생각하지? 매그너스는 이를 악물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이 여자는 그를 심부름꾼이나 자신의 하인, 혹은 마음껏 부려먹을 종 따위로 생각하고 있다.

아니, 틀리다, 빌어먹을, 그는 노예다. 이 헬리시움의 왕이, 목을 베어라! 하고 제 내키는 대로 외치던 폭군이, 그 여자의 발밑을 기며 바닥에 입 맞춘다. 그 여자의 한 마디에 크림처럼 새하얗고 자그마한 발끝을 핥으며, 아니 사실은 그 스스로가 그리 하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채로 괴로워하며 안달하며ㅡ

 

미소 지은 얼굴, 여자는 그 어떤 감격도 느낄 수 없는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강요하지 않는다, 기다릴 뿐이었다. 그가 제 발로 무릎을 꿇고, 땅을 짚고 고개를 숙여 성스러운 발등 위에 죄 깊은 입술을 겹치며,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그리하겠다, 그리하겠습니다 나의 사랑, 하고 더없이 비굴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순간을.

 

당연히, 매그너스는 그럴 리가 없다. 없었다. 없었‘었’다. 그러나 끔찍하게도 그 건방진 입을 틀어막고 새하얀 목을 비틀어, 쓰러진 사랑스러운 육신을 갑주를 두른 발로 짓밟으며 비웃는 일이,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허락되지 않는다. 허락하지 않았다. 허락하지 않았다. 그 여자가 제 몸의 권리를 죄다 틀어쥐었다, 아니다, 그가 그녀에게 쥐어 주었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그래, 그 여자가 손끝을 살짝 까딱이면, 그는 마치 줄에 묶인 꼭두각시 인형처럼 몸을 비틀어야 한다. 오직 그녀의 즐거움을 위해서 광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명령은 어디에 있지?

아무도 그에게 그리하라 하지 않았다. 그래,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 강제조차 없는 지배였다ㅡ 허락하지 않은 것도 자신이었고 우스꽝스럽게 비틀대는 것도 자신이었다, 그 발치에 입 맞추며 괴로울 정도로 달콤한 쾌락에 헐떡이는 것도 자신이었다.

 

여자는 그가 쥐어 준 줄조차 미소 지으며 놓아버렸다, 그 사랑스러운 웃음으로, “성가셔” 하고 말했다. 그녀는 개를 기르지 않는다, 관리하기 귀찮았으니까. 그것이 폭군이라는 이름의 더없이 오만하고 찬란한, 제 앞에서만 굴종할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남자라 하더라도.

 

그 여자에게 매그너스는, 가치가 없었다.

 

 

“필요 없잖아. ...... ......가져다 줘 봐야 너, 하루 뒤... 아니지, 반시간도 안 지나서 내팽개쳐 둘 거 다 알고 있어. 저번에도...”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바로 이전에는 신수가 마신다는 월로라는 것을 차로 끓여서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 전에는 하얀 꽃으로 화관을 엮었다. 그 전에는, 그리고 그 전에는... 그런 세세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그의 일상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도, 그가 툭 뱉은 말들을 아주 쉽게 돌이키곤 했다.

그것은 그가 그녀의 말을 기억하는 이유와는 다르다, 매그너스는 그 여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절박하기 그지없는 성서이고 몇 세기를 헤어도 잊지 못할 신명이었으나, 그 여자는 그저 기억력이 좋을 뿐이었다. 지독하게도 멀고 먼 차이였다.

 

 

그가 입을 다물었음에도 여자는 제 말을 읽었다는 듯이, 가만히 짙은 웃음을 내리깔았다. 아, 끔찍하게도. 눈치도 빠른 계집. 혹은 제가 너무도 그녀의 예상대로만 움직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야 당연하다, 죽어가는 이의 몸짓은 언제나 한결같다. 굴종하거나, 반항하거나, 혹은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로 움직임을 멈춘다.

빌어먹을, 매그너스는 갑갑한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더운 숨을 가늘게 뱉었다. 삼켜지는 것 같았다.

 

 

“네가 그렇게 안 둘 거잖아?”

“......”

 

 

그래, 뒤처리는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그는 그녀가 흥미 잃은 꽃을 거두어 분명히 목이 길고 새하얀 꽃병에 꽂아서, 더는 줄기가 푸르지 않게 될 때까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둘 터였다.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눈에 걸리도록.

그러나 분명히 그녀는 그것을 보고서도 빙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돌릴 것이다. 더는 필요 없다며 툭 밀어 치워도 기어이 눈앞에 갖다 두는 것은 의미도 없는 그의 심술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심술조차 여자에게는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피안화, 죽은 자를 위한 꽃. 지옥의 꽃. 그 여자와는 더없이 잘 어울리는 꽃이다. 허락한다면, 그 하얀 귓가에 꽂아 주고 싶었다. 반짝이는 설백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끔찍하게 아름다운 새빨간 눈동자를 닮은 그 빨간 꽃을, 제 죽음 대신에 바치며 한숨짓고 싶었다.

 

지독하게 사랑스러울 것이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눈부시게, 그 어떠한 예술품보다도 섬세하게 빛나겠지. 크림 같은 가녀린 어깨와 얇은 손가락, 둥근 귓바퀴와 분홍빛 손끝과, 하얀 이마와 보드라운 볼과 풍성한 속눈썹, 온 세상의 불빛을 담은 듯이 반짝거림이 녹아내리는 새빨간 눈동자, 가닥가닥 늘어진 설탕 실 같은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선명한 붉은색의 꽃이 그린 듯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독이 옮겨 붙은 꽃은, 볼 때마다 그의 심장 위에 화상을 덧그리겠지. 고통스럽게, 사랑스럽게...

 

 

“...언제까지.”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눈을 휘어, 또 웃는다. 지금 당장.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독하게 건방지고 오만하다, 동시에 제 주제를 그 무엇보다 잘 알고 있다. 아, 그녀는 그럴 가치가 있는 인간이다. 매그너스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다, 자신이 무릎 꿇는 여자라면 그 누구도 고개를 들게 할 수 없다.

 

매그너스는 꽃 따위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은 명령과 검, 한없이 죽음에 가까운 탐욕의 산물들. 감상에 젖을 시간은 원하지 않았고 그의 취향과도 맞지 않는다. 어디서 피어나는지 언제 피는지, 그것은 제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원한다 했다. 이의는 말할 수 없다, 그는 이제 꽃을 꺾어 올 것이다.

 

여자는 제가 아둔하게 허둥대는 모습을 좋아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았다, 그것은 간단한 악의이고 어린아이의 것 같은 장난이다. 할 말은 있었다,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는 그녀를 위한 인형도 꼭두각시도 아니라고 화를 내며 어깨를 틀어쥔 적도 있었다. 겁박하고 으르며 위협했다.

그런데 여자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정말로 즐거운 표정으로, 어깨를 틀어쥔 손을 스르르 잡고 제 목 위로 옮겼다. 그러고는 웃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소름끼치는 섬뜩함.

 

그녀는 내키는 대로 장난을 저질렀다. 무료를 느끼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여 조금이라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그가 잠시라도 눈을 떼거나 그녀의 뜻을 거스른다면, 그녀는 웃으며 그의 가장 소중한 것을 망가트린다.

장난의 수단은 대개 파괴이고, 그녀는 매개를 가리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저지른 장난에 허둥대고 고통스러워하며 이를 악물고 미간을 찌푸리는 그를 즐거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그의 위협에 겁을 먹을 리는 없었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몸조차 칼날로 베는 여자가, 그의 약점이 그녀 스스로인 것을 끔찍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매그너스는 꽃을 꺾어야 했다. 여자는 그가 그것을 행하리라는 것을 당연하게 확신하고 있다. 자신이 원한다고 말했으니까,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감각을 주고 싶지 않는 그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매그너스가 제 명령을 받드는 것으로 조금 달콤한 감정을 삼킬 수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굳이 그리하지 않아도 그녀 스스로에게는 손해가 없었다, 단 하나 여자를 못마땅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가만히 왕좌에 앉아 손을 까딱이는 짓 따위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제에 쾌락만은 얻어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지,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여자를 조금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눈을 떼면, 또 못된 장난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허나 그녀는 감시받는 것도 싫어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애원뿐이었다.

 

 

“...곧 올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흐응.”

“정말 곧 올 거다, 잠깐 자고 있던가, 아니면...”

 

 

손을 내젓는다. 팔랑팔랑, 여자는 흥미 없는 표정으로 대화에 종말을 고했다. 더 이상 이어가는 말은 의미가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늘어지는 제 마음을 끊어내듯이 몸을 확 틀었다.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만약 둘의 관계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냐 묻는다면 매그너스는 망설임 없이 그 여자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라고 대답할 것이었다. 망가지듯이 뒤틀린 운명, 위대하고 오만한 폭군이 하찮은 하얀 꽃 한 송이 앞에 무릎 꿇고 무너져 내린 날.

그것이 눈길만 마주해도 모든 것을 부수는 독초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렇다면 그는 차라리 눈을 감았으리라. 최후의 최후까지, 목을 베이고 제 목덜미에서 배어나온 피가 온 갑옷 사이로 스며들고 성채의 바닥을 적시더라도, 그렇게 비참하고 무의미한 최후를 맞이하더라도 결코 그 여자가 알아채게 두지 않았으리라. 제 눈앞의 맹수가 짐승이, 그 연약한 독에 지배당해 단말마를 뱉은 것을 알게 두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폭군의 성채에 디딘 하얀 발은 때 묻지 않은 날것이었고 더없이 천진난만한 미소는 전투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부조화, 매그너스는 단숨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 꽃잎처럼 연약하고 크림처럼 덧없는 하얀 어깨 위로 그만큼이나 하얀 머리카락이 성채의 불빛에 사르르 반짝이며 흐트러져 있었다, 톡 치면 녹아내릴 것 같은, 후 불면 흩어지고 말 것 같은 하얗고 몽롱한 온 몸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을 때, 그는 얻어맞은 것 같은 격통을 느꼈다. 누군가가 심장 안에서 뛰어나가려 하는 것 같았다, 혈관 속에서 몸부림치며 터져 나올 듯 했다. 그러다가 언뜻 모든 것이 멈춘다, 인지되는 것은 백색의 멍멍한 소음뿐이었다, 그리고 새빨간 눈동자, 자신을 바라보는 투명하고 선명한 눈동자. 유리처럼 텅 비었으며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도 반짝이는 눈동자.

 

그 여자는 영혼을 삼키는 악마였고 매그너스는 자신의 혼이 그 두 눈동자에 선명히 차오른 뒤에야 그것을 알았다.

손끝이 굳어지고 두 다리가 후들거리며 온 몸에 힘이 빠져 검조차도 제대로 붙잡지 못한 채로, 파도에 부딪혀 일어나는 흰 물거품처럼 덧없이 아름다운 움직임에 시선이 빼앗기고, 그 손에 든 것이 시퍼렇게 날을 번뜩이며 제 목숨을 삼키려 하는 것을 알면서도 맥없이 그 탐욕적인 불길을 마주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음에, 맞부딪히고 마주하는 검에서 전해지는 충격에 몸을 떨며,

어째서인가.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이 여자를 죽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움직임이 어긋나고 있음을 알면서도, 움직여야 할 방향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몸은 천천히 무뎌져갈 뿐이었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부딪힌 갑주에 흠집을 남긴다, 여자는 지독하리만치 천진난만하게, 더없이 빛나는 웃음으로 매그너스의 가슴에 흠집을 남겼다.

 

이 방향이 아니다, 검을 휘둘러야 하는 것은 조금 더 아래였다. 이 여자는 그리 뛰어난 실력자도 아니다, 몰아치는 힘이 강할 뿐 단순하기 그지없는 기술이다.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휘두른다면 일격이었다. 그는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결코 그럴 수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볼이 화끈했다, 귀 끝까지, 데인 듯이 길게 뜨거운 통증이 훑고 지나갔다. 바닥에 떨어지는 핏자국 소리로 그는 자신이 베였음을 알았다. 머리가 뜨겁다, 우유 덥힌 냄새, 설탕을 녹이는 것 같은  달큰한 탄내, 끈적하고 비몽사몽한 캐러멜 냄새가 났다, 온 세상이 비틀어지고 이지러지며 시꺼먼 죽음의 베일을 그의 발아래 휘감는다, 그럼에도 멍한 눈이 뒤쫓고 있는 것은 기울어지는 신형을 바로 딛을 바닥이 아니라 제 앞의 하얀 물결이었다.

 

자문한다. 후회하는가? 스스로가 어리석은가? 되돌아간다면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인가? 후회했다, 어리석었다. 그러나 그는 몇 번이고 이 순간이 반복되어도 같은 결과를 내어줄 것이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선택이었고, 종말이었다. 멍청한 매그너스, 멍청한 남자.

여자는 망설임조차 없이 그의 복부를 짓밟고 칼을 치켜든다, 그는 혀끝을 깨물며 앓는 소리를 삼켰다, 폭군의 혼을 삼키고 더없이 찬란하게 반짝이는 새빨간 눈동자가 잔뜩 찌푸린 표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연옥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스스로가 훤히 들여다보일 것을 모르고.

 

그 여자는 웃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눈썹을 조금 들어 올리고는 말갛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표정을 바꾸었다, 입가에 내려둔 미소가 짙게 반짝이고 하얀 속눈썹이 우아하게 내리깔린다.

온 세상이 사르르 녹아내릴 듯이 달콤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화려하게, 단 한 순간에 세상이 만개한다. 매그너스는 그것이 제게서 받아간 어떠한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 찬란한 순간을 바로 앞에서 응시할 수 있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렇게, 생각했다.

 

 

아.

"너."

 

 

새하얀 장막이 꽃잎처럼 흩어지며 그의 시야를 가린다, 제 몸 위로 지는 그림자마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여자는 새빨간 눈을 반뜩이며 미소 지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두 숨이 섞인다, 천천히 가까워지는 얼굴에 갈증이 났다. 가슴이 메슥거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달콤한 더운 숨이 입가에서 녹아내린다. 조금, 맞닿은 것도 같았다.

 

 

"나를 사랑하는구나."

이 손 아래에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떨어진다, 혹은 올라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게 있는 생명이란 생명은 전부 그 여자에게 삼켜졌다, 이제 그의 몸 안에는 그 어떠한 색도. 아니다, 있다, 그가 목을 베인다면 어느 나라의 순교자처럼 새하얀 피가 뿜어져 나올 것이다. 악마에게 온 빛을 삼켜진 증거, 독으로 멎어버린 하얀 심장.

 

나락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백색이었다.

 

 

 

“이제 필요 없어.”

“...이런 젠장,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여자는 눈을 휘며 웃는다. 그래봐야 네가 무엇을 어쩌겠냐는, 기만이 그득 담긴 웃음이다. 혹은 여태껏 제 손을 잔뜩 베여가며 헤매던 매그너스 자신의, 짜증이 가득한 시선이었기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아, 그 무엇이든.

그는 인상을 구기며 가져 온 꽃을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빌어먹을 계집애, 빌어먹을 매그너스. 이럴 줄 알았으면서도 팍 시드는 제 자존심이 역겹기 그지없었다. 알았으면 하지 말지 그랬어? 그런 얄미운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으나, 그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사랑스러운 핑크색의 입술은 호선을 그은 그대로 굳게 닫혀 있을 따름이었다.

 

여자는 꽃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자그마한 단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시퍼렇게 선 날을 손 쪽으로 한 채, 장난감이라도 되는 듯이 여린 살갗으로 하얀 날을 짓누른다. 뾰족한 날 끝에 보드라운 손가락이 찔려, 그 눈동자마냥 새빨간 핏방울이 두어 방울 흐르는 것이 아주 천천한 형상으로 그의 두 눈에 흘러내렸다.

 

 

“르네!”

 

 

손목을 콱 잡아 쥔다. 차가운 날으로 비집혀 벌어지던 상처 틈에서 피가 툭툭 떨궈져 내렸다, 여자는 깊게 눈을 휘어 웃으며, 그를 바라본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지독하게 사랑스러워서 토할 것 같다. 하얀 단검 끝에서 핏방울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여자는, 르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다친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잖아?”

“영원히 얌전히 있을 수는 없나?”

“조각상을 원한다면 빅터에게 달라고 하렴.”

 

 

그 애는 그런 거 잘 만들잖아. 잡힌 손목을 가볍게 비틀며 웃는다. 잔인하고 악독한 여자, 그에게 맞춰지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여자였다. 그에게 꺾일 바에야 사라져버릴 것이다, 영원히 반짝이는 아름다운 꽃을 바란다면 그리 필 뜻이 없으니 조화를 가지라 속삭인다.

그의 온갖 것을 다 가져 놓고 저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게, 그녀에게 그는 가치가 없으니까. 하찮은 잡동사니를 그득 떠안기고 제 보석을 달라는 말에 대체 누가 응할까.

그 잡동사니가 세간에서 아무리 날고 기는 보물이라 하더라도, 그 보석이 그 누구도 원해 본 적 없는 싸구려 큐빅 정도의 취급이더라도, 그럼에도 매그너스에게는 르네의 보석이 제 심장보다도 아름다웠고 르네에게는 매그너스의 고물이 성채에 쌓이는 시체보다도 하찮았다.

매그너스가 심장을 담보로 바란 것은 그녀의 눈길, 손짓, 그저 스스로를 상처 입히지 않아 제 가슴을 아프지 않게 하는 것, 가끔은 아주, 작은, 다정함을.

 

입술 사이로 떨리는 더운 숨이 뱉어진다, 매그너스는 눈을 꽉 감으며 하얀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타액에 녹아 섞이는 비릿한 혈액, 그가 상흔을 혀끝으로 더듬을 즈음에는 이미 벌어진 상처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그것이 더없이 괴로웠다, 르네는 상처입어도 끝없이 회복한다. 그래서 그녀에게 자신의 몸은, 매그너스를 괴롭히기에 안성맞춤인 소모품이었다. 어째서, 아프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그 고통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달이 날 정도로 몸이 달지만 동시에 그 아무렇지도 않은 파괴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가슴이 찢어질 듯 했다.

 

르네는 아주 오래 살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습관 같은 웃음은 필멸자의 것이 아니다, 산 생명으로써 그리 마음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아, 자신조차. 제 심장은 얼어붙은 검이리라 비웃으며 그 어떠한 감정도 짓밟던 매그너스 그조차도 끓는 용암이 되어 몸부림쳐 흘러내리는 하찮은 남자가 되었는데.

그녀에게서 보이는 감정의 조각은 성가심이나 아주 가벼운 즐거움뿐이었다, 그것이 본디 한 덩어리였을 것을 그는 알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덩어리째 깎여나간 삶을, 그녀는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상냥한 웃음에는 단 하나의 따뜻함도 없으며 부드러운 손짓에는 그 어떠한 배려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확신이다, 르네가,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한 눈에 꿰뚫어본 것과도 같은, 그런 확신이었다. 매그너스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다, 그러나 그녀도 그도 끔찍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어떠한, 그녀의 생에서 거쳐 온 무언가의 흔적이겠지.

언젠가 생명을 잃는다면 매그너스는 생채기보다 못한 흔적이 되어버릴 것이다, 아무리 그란디스에 커다란 흉터를 남겼어도, 그녀가 거쳐 온 위대한 세월에는 아무것도 아니리라. 그것이 지독히 괴로웠다, 그러나 다만 이 순간에 그 손끝에서 무너져 가는 것이 시리도록 달았다.

 

 

“매그너스.”

 

 

차가운 손끝이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부턴가 흐르고 있던 눈물이 그 구원에 거두어져 훔쳐진다. 그는 또 울었다,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몸에 닿아오는 손,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그 눈동자가 언뜻 애정을 담은 듯 보이는 것이 지독하게, 지독하게 좋았다. 그녀의 생 아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에는 그녀가 전부였다.

 

감은 눈꺼풀 위로 말캉한 감각이 닿아 온다. 얇은 살갗 아래로 바르르 떨리는 안구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숭고한 입술 위로까지 떨림이 전해지고 있을 터이니까.

지독한 환희에 젖은 제 표정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너무, 너무,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이 순간이 지독하게 좋아서, 중독되어 죽어가는 모든 것들이 끔찍하게 괴로워도, 포상처럼 내려지는 아주 가끔의 접촉, 다정함을 닮은 작은 조각이 그 모든 죽음을 잊게 할 정도로 황홀해서.

 

이를 악물고 흐느낌을 참는다. 의미조차 없는 반항이다, 그러나 그 자신에게만큼은 어떠한 버팀목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하면서도 단 한 번 사랑한다는 말을 내어놓지 않는 것과도 같은, 그런 어린아이 같은 고집.

 

 

 

또 웃음소리가 들린다. 빌어먹을 계집애. 폭군이라 불리는 덩치 큰 사내놈이 주둥이가 긴 하얀 꽃병을 들고 돌아다니는 것이 퍽 우스운 모양이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긁힌 제 볼이 서러워서라도 이걸 어떻게든 해야겠다. “벨데로스, 이건 어떻게 쓰는 거냐?” “매그너스 님... 그냥 제가 할 테니까 제발 두세요...” “닥쳐, 내가 할 거야.” 또 웃는다. 망할 계집애, 얄미운 르네, 지독한 여자. “야, 이거 깨졌는데?” “방금 매그너스 님이 깨셨네요...” 또, 또, 또 웃는다.

내가 웃겨? 응, 웃겨. 제가 준비해 놓은 부드러운 쿠션 소파에 몸을 기대고, 너무 웃어서 그렁대는 눈가를 계속 웃는 낯으로 훔치는 모양새가 얄밉기 그지없다. 허나 별 수 있을 리가 없다, 성채의 주인인 자신이 그녀에게 복종하고 있으니 온 세상이 그녀의 것이 아닐 리 없지.

 

 

“매그너스 님, 그러니까 제발 두세요... 그런 건 제가 하면 되잖아요...... 왜 사서 일을 만드시는 거예요... 깨신 거 제가 치워야 하잖아요...”

“아, 거 사내놈이 더럽게 쨍쨍대네.”

 

 

갑주에 부딪혀서 동강나는 것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매그너스는 울고 있는 제 부하를 무시하고 다섯 번째 꽃병을 꺼내들었다. 역시 자갈은 됐다. 어차피 줄기뿐인 꽃, 곧 죽을 것을 위해서는 꽃병 하나면 충분하다. 이리 두면 벨데로스가 알아서 하겠지.

아직껏 키득키득 웃고 있는 여자를 외면하며 코웃음치곤 꽃병에 물을 담는다. 무늬도 없는 새하얀 것이 여린 무지갯빛의 광택을 흘리며 반짝이는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지독하게 여린 광택이기에 새빨간 꽃과도, 아직 파란 줄기와도 잘 어울리는 것도 만족스럽다.

 

 

그는 여자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새하얀 꽃병을 놓았다. 언뜻 시선이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테이블 위의 목이 긴 꽃병, 긴 줄기의 위에 물기를 머금고 반짝이는 새빨간 피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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