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피노 진X그랑2P

나는 이미 맹세했어.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네게 내 존재 자체가 해가 된다면 너를 위해서 죽기로. 그렇게 맹세했어. 그러니까, 내 사랑아. 부디 슬퍼하지 말아줘. 비록 내가 네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

.

[그랑은 노크였어.]

 

칠흑의 어둠 속, 달빛만이 유일하게 방을 비추는 그 방에서 그 남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원을 끄지 않은 휴대전화에서 알려주고 있는 단 하나의 사실. 그 한 문장이, 남자를 괴롭게 했다.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눈치가 빠른 남자이니. 하지만,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그 사실을 부정하고, 또 숨겨왔다. 결과는 결국 그를 나락으로 끌고 들어왔지만.

 

“냄새나는 것들은 없앤다.”

 

그가 지끈거리는 제 머리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노크, 조직의 해가 되는 존재. 마땅히 처리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는 늘 망설임 없이 그들을 죽이고 또 죽여 왔다. 하지만, 그가 지금 처음으로 노크를 죽이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 고작 저가 아끼는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저답지 않은 생각에 남자가 제 품 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는 몸에 좋지 않아, 진. 끊는 건 어때?’

 

허나 불을 붙이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그녀의 말에 짜증난다는 듯 혀를 차며 물고 있던 담배를 도로 손으로 집어서는 다시 담뱃갑 안으로 담배를 집어넣었다. 곤란하군. 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그녀와 관련된 것들만이 그의 눈에 띌 뿐이었다. 

진에게 그랑이란 존재는 소중하고, 소중했다. 적어도 언제나 제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배신당할 줄은 몰랐지만.  

 

“나다, 그랑. 지금 당장 조금 봐야겠는데.”

“이 시간까지 일.. 어디서?”

“창고. 낮에 갔었던.”

“가깝네. 금방 갈게.”

 

짧은 통화를 마친 진이 제 차의 키와 평소 사용하는 작은 권총을 가지고 차에 올랐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일은 시작되었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흔들려서는 안 되니까.

.

.

진이 약속한 장소에 도착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은 시끄러운 엔진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모습이 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기다렸어?”

“아니, 들어가지.”

“중요한 일 인가봐? 이렇게 서두르는 모습은 오랜만인데. 워커도 없고.”

 

중요한 일이지. 진이 속으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속으로 곱씹으며 짧게 내뱉었다. 지금 그들은 지금 버려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암흑으로 둘러싸인 창고 안에서 단 둘이 존재했다. 오직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작은 달빛만이 창고 안의 부분 부분을 비추었다. 어두워. 그랑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진이 있다고 추정되는 곳을 향해 작게 말하였다. 그랑의 말에 진이 그랑의 쪽을 흘깃 보더니 제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불을 붙였다.

 

“가장 안쪽으로 가지. 따라와.”

“담배는 몸에 좋지 않다니까 그러네.”

 

그냥 불만으로도 괜찮은걸. 그랑이 진의 담뱃불을 따라 뒤를 쫓으며 중얼거렸다. 진은 그런 그랑을 향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며, 그저 속을 채우는 담배 연기를 밖으로 뱉어내며 창고의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그랑.”

“응?”

“..그랑.”

“그래, 진.”

 

망설임. 버려야만 하는 감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녀를 부른 이 순간까지도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랑. 네가 노크라는 소리가 있는데.”

 

마침내 진이 제 결심을 굳힌 듯 코트 속에서 총을 꺼내 그랑을 향해 겨누며 물었다. 부정하길 바랐다. 그녀가 노크여도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녀가 제게 거짓말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알아버렸구나. 맞아, 내가 노크지. FBI소속.”

 

그녀는 너무 솔직했고, 예상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마치 진의 손바닥 위에 있듯이, 그의 예상대로 행동하고, 말했다. 그렇기에 더 망설였다. 그녀를 죽이는 것에 대하여.

 

“알고 있었잖아? 처음부터.”

“그래.. 예상은 하고 있었지.”

“그런데 무얼 망설이는 거야? 냄새나는 건, 죽여야지.”

 

하지만 그에 역시, 그랑은 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서로가 최대의 적. 그것이 진과 그랑의 관계였다. 가장 가깝지만, 어쩌면 가장 멀면서도 가장 견제해야 할 사이.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날 묶는 게 먼저 아냐? 아니면, 코른이나 키얀티에게 암살을 지시하거나.”

 

그랑이 그녀 특유의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진을 향해 말했다. 처음부터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지금 제게 느끼는 건 동정, 혹은 연민. 그 이상도 그 이하의 감정도 아닐 거다. 그랑은 속으로 웃고 또 웃었다. 그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경계하고 모두가 꺼리는 사람. 그런 그가 제 감정 하나에 흔들리며 저를, 그랑 자신을 봐주는 꼴이라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죽길 바라는 건가?”

“더 살려고 발버둥 쳐도, 언젠가는 잡혀 죽어버릴걸?”

진의 물음에 그랑이 여전히 그를 조롱하듯 답했다. 차라리 지금 그의 손에 죽는 것이 나았다.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저가 살 확률은 적었다. 아마도 곧 뒤를 밟히고, 누가 날 겨누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멍청히 있다가 죽어버리겠지. 

 

“있잖아, 진.”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는 거, 꽤 로맨틱하지 않아? 그랑의 뜬금없는 물음에 진이 헛웃음을 자아냈다. 그녀는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제게 다가온 자. 그런 감정 따위 처음부터 없었을 지도 모른다. 저만 그녀의 손에 놀아난 관계였겠지. 로맨틱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진이 여전히 총을 그녀의 머리를 향해 겨눈 상태로 답했다.

 

“그래, 그렇지. 네가 이 상황에서 그런 걸 따질 리가 없지. 그럼 뭘 고민해? 어서 날 죽여.”

 

그랑이 입 꼬리를 올려 웃더니 진에게 다가가 그가 손에 든 총의 총구를 제 가슴을 향하게 만들었다. 진의 앞머리로 가려진 그 눈에서, 작은 흔들림이 보였다. 

 

“망설이지 마. 너는 망설임 같은 건 없어야 하는 존재야. 그런 감정을 가져서도 안 돼. 고작 나 같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지 마. 그리고.”

 

부디, 슬퍼하지 말아줘.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창고 안에 울려 퍼지는 3번의 총소리. 진의 신발에 젖어 들어가는 붉디 붉은 선혈들. 진이 들은 그녀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들. 무슨 의미였을까, 물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죽어버렸다. 자살도 타살도 아니다. 아니, 깊게 보면 자살일지도 모른다. 그녀 스스로 죽음을 택했으니. 

 

“슬퍼하지 마라, 라니. 재미있군.”

 

붉은 선혈 속에, 투명한 액체가 섞이지 못한 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버려야 할 감정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담은 액체들을 모두 떠내려 보낸 채 홀로 남은 그가 제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발로 지져 끈 뒤 품 속에서 담배를 새로 꺼내 입에 물고는 밖을 향하였다. 여전히, 불은 붙이지 않은 채로. 

-

bottom of page